한국은행 조사2부는 우리나라의 경제통계를 만들고 경제의 움직임을
알 수 있도록 각종 경제지표를 작성 분석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김성환 총재의 지시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경기지표"를
만들게 되었다. 김총재께서는 일본이 이 지표를 만들어 이미 사용하고
있는데 숫자로만 보일것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알기쉽게 신호등 표시로
나타나게 하라는 것이었다.

직원을 일본에 보내 편제방법을 배우도록 하고 주요 경제지표인 통화량
물가 생산 투자 기계발주 수출신용장내도액 수입면장발부액등을 교통신호
같이 파란불 노란불 빨간불 등으로 표시했다. 이 표시를 평균해서 총체적인
경기가 파란불이냐 노란불이냐,또는 빨간불이냐를 나타내도록 한 것이다.

72년4월 금융통화운영위원회에서 선배 두분이 이사로 승격되었다.

나는 이 회의에 참석했다가 인사안이 의결된후 회의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슬쩍 잡기에 돌아보니 김총재였다.
김총재는 "박부장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요. 다음기회엔 꼭 승진시킬테니"
라고 하기에 감동해서 "감사합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72년8월2일 저녁에 비상소집이 걸려 나는 배부총재방에서 "8.3조치"에
관한 인쇄물 책임자로 임명돼 "삼화인쇄소"서 밤샘을 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래서 인쇄소로 떠나려는데 배부총재가 "박부장 잠깐"하고 나의 손을
잡으며 "축하합니다. 내일자로 이사가 됩니다"라고 귀뜀해주어 뜻밖의
일이면서도 4개월전의 김총재가 말씀이 실현된것을 알았다.

나도 이제 이사가 되었구나 하는 감격에 삼화인쇄소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동료이사중 한분은 "8.3조치"에 대해 남이 차고있는 손목시계를 빼앗아
돈많은 기업가들에게 주었다고 혹평을 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그같은
평가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기업가는 정부특혜에 기생하는 모리배요,부정축재자라는 일부의 비판은
옳지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슘페터의 "기업가 역할"이론이 가장 정확하고 정당한 기업평가라고
생각했고 아직도 그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돈을 벌겠다는 기업가의 강한의욕이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실업자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망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투자를 하고 안팔릴지도 모르는데 시설을 확대,
일자리를 증가시키며 경제를 발전시키는 주역이 기업가이므로 "8.3조치"로
사채를 동결해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시키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서 나는 좌담회에도 나가고 신문에 글도 쓰고 해서 정부의 8.3조치를
옹호했다. 기업의 부실화는 기업가가 경영을 잘못한 결과이므로 부도가
나거나 도산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업의 책임이라는 일반론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이유는 정부정책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10%의 인플레
로 인해 생산원가는 10%씩이나 올라가는데 환율은 66년부터 현실화가 안돼
수출기업은 출혈수출을 감수해야 했던게 당시 상황이었다.

미국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대출금리가 다소 인하되긴 했으나 72년초까지
만도 22%의 높은 수준이었다. 더욱이 기업들은 사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여건이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병이 깊어질수 밖에 없게 돼있었다.

나는 그래서 기업이 물에 빠지는 것을 구한 8.3조치를 기업의 건강은 곧
국민경제 발전의 근본이라는 옳은 판단아래 취한 용기있는 조치라고 생각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