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국회가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구태가 다시 살아난 듯한 느낌이다.
그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의아하게 한다. 이번 정기국회 초기에는 그런대로
무엇인가 달라져가고 있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2일 예산안처리시한을
앞두고 국회는 또다시 종래와 같은 여야극한대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이는 민주당측이 추곡수매문제와 안기부법개정을 예산안처리와 연계시킨다
는 방침을 굳힌데서 발단되었다고 볼수 있다. 여기에다 UR협상의 쌀개방
문제가 긴급한 현안으로 떠올라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다. 여당측에선
여의치 않을땐 예산안의 단독처리강행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고 야당측
에선 장외투쟁을 거론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되면 국회는 파행국면을
맞게될 것이 뻔하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각기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겠지만 국민의 눈으로 볼때
는 이것은 국회의 존재의미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정기국회는 통칭
예산국회라고 하는데 내년 국정운용의 골격이라고 할수 있는 예산안이
제대로 다뤄지고 있는지, 산적해있는 민생관련 법안들의 문제점은 조목조목
따져지고 있는지 한심한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처리하기로 한 법안만도
1백83개에 이르고 있는데 여야가 옥신각신만 하고있으니 12월18일까지의
남는 회기안에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걱정이다.

우리 국회는 그전부터 회기의 대부분을 여야의 입지와 관련된 정치현안을
가지고 파쟁적 대결국면을 연출하는데 다 써버렸다. 막상 민생이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의안들은 막판에 무더기로 처리하곤 했다. 이런 행태
는 국회가 정치인 자신들의 입지확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분간키 어렵게 한다.

법안의 졸속처리가 야기하는 문제는 중대하다. 의원들이 법안심의능력이
부족하거나 시한에 쫓겨 총론적 성격의 규정들만 법에 담고는 실제로 민생
이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사항들은 시행령등으로 정부에
위임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률보다는 시행령자체가 더 힘을
쓰게 되고 이것이 행정만능을 조성한다.

이같은 입법행태는 공무원들의 공무수행을 어렵게 할뿐아니라 행정의
자의성을 증대시켜 국민들이 행정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게 한다. 행정의
불투명성을 높이고 온갖 비리의 소지가 되기도 한다. 이는 분명 국회의
고유권한인 입법권을 실질적으로 행정부에 떠넘기고 포기하는 것으로서
3권분립 구도를 파괴하는 것이다.

한.약분쟁으로 나라를 온통 벌집쑤셔놓은듯 했던 약사법개정만 해도
그렇다. 국회는 이 문제를 정면돌파할 각오로 치밀히 연구하여 분쟁이
조정되게 개정안을 확정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보도된바에 의하면 많은
보사위원들이 "말썽안나게 좀더 완벽한 법을 만들어오라" "제발 국회에서
왈가왈부되지 않을 문제없는 법을 만들어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누구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인지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다.

금융실명제는 경제에 있어선 혁명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 경제에
미칠 영향이 심대하기 때문에 국회에서 당연히 본격적으로 후속조치를
논의해야 한다. 분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실련에서도 세원이 분명하게
노출되는 점을 들어서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증여세의 세율을 대폭 인하
해야 한다고 국회에 청원하고 있다. 그런데도 말로는 경제를 걱정한다는
국회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쌀개방문제만 해도 이것은 국제적 협상의 문제이지 국내에서 투쟁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UR협상은 냉엄한 국제적 현실이다. 여야가 국회안팎
에서 대결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여야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한국농업
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문제의 핵심
은 덮어놓고 손바닥으로 바위만 치고 있으니 답답한 국회가 실망만 주고
있다.

여야가 국회에서 끝없는 평행선을 긋고있는 것은 선거때 무책임하게 내
놓은 각종 공약과도 관련이 있다. 이제 실현될수 없는 공약의 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정치인은 공약에 신중해야 한다. 쌀문제
도 그렇고, 각종 예산사업도 실행하기 어려운 공약들이 걸림돌이 되어 여야
격돌을 유발하는 점이 없지 않다. 국회는 좀더 대국적 국가진로를 생각해야
만 여야대결이라는 소모전을 지양할수 있는 것이다.

국회가 하루속히 본연의 입법기능과 국정논의의 정상활동으로 되돌아가기
를 기대한다. 지금과 같은 구태의연한 여야대결로는 국제화엔 문맹이 되고
경제 민생문제 대응에도 실격이 될수밖에 없다. 그것은 스스로 국회를 격하
시켜 민주주의의 기본구도를 손상시키게 된다. 정치인 자신들의 체통에만
매달려 기본임무를 망각하면 국정에서의 입법부소외를 자초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