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폭적인 개각이 이루어졌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거의
1주일동안 어느자리에 누가 앉을 것이냐에 국민의 이목이 집중됐다.

새 자리를 맡은 장관들이 앞으로 어떤 정책을 내세우고 나라살림을 이끌어
갈 것인지 한동안 분주할 것이다.

그동안 떠들썩했던 쌀문제가 개각바람을 타고 날아가버린 느낌이다. 우리
처럼 인사문제에 국민의 관심이 통째로 쏠리는 나라는 없다. 이러한 국민
들의 마음을 읽는 집권자는 어려운 국면을 바꾸기 위해 개각이라는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각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게 있으면 당연히 물어야 한다.
민심을 수습하고 새로운 각오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도 개각은 필요
하다.

그러나 이번 개각이 단순히 국민의 관심을 쌀문제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것일수 없다. 쌀문제 이후의 개각과정을 지켜보면서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 보자.

첫재 김영삼정부의 제1기 내각은 그 공과를 따지기에는 재임기간이 너무
짧았다.

이번 개각은 어떤 책임을 묻는다기 보다 실제로 일을 밀고 나갈 진용을
새로 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것 같다. 몇몇 각료에게 쌀문제에 대해
책임을 묻는 형식을 밟았다해서 쌀문제가 한 고비 넘겨진 것은 아니다.
농업과 농민과 농촌을 살리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제1기 내각은 "개혁과 변화"를 부르짖는 분위기속에서 각 부처,특히 경제
부처는 호흡이 서로 맞지 않았고 정책의 알맹이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다. 기업 근로자는 물론 일반 국민들은 정의라든가 개혁이라는
거창한 구호보다 그러한 구호를 구체적으로 실현시켜주는 정책을 바라는
것이다.

이번의 개각은 그야말로일을 제대로 추진해야할 책무가 막중하다. 95년의
지자체선거,96년의 총선,97년의 대선을 고려할때 94년 한해는 경제 사회
문제를 논리대로 풀어가고 나라의 기반을 다질수 있는 해다.

둘째 김영삼대통령은 개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전격적으로 국무총리를 경질했다. 이걸 두고 고의적으로 속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고정환율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의 재무장관이 환율인상을 고려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하자. 그 결과 외환시장은 얼마나 큰 혼란을 겪을
것인가.

또 화폐개혁을 계획하고 있다해도 누가 그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개각 불고려 언급은 그것이 비록 거짓말이었다해도 허용될 수 있는
거짓말이라 할수 있다. 행정공백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국무총리 경질에서부터 대폭 개각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점에 있다. 인선에 신중함을 보인다고 해서 중요한 국가살림을
책임질 자리를 사실상 공백상태로 둔다는 것은 바람직한게 아니다. 뻔히
바뀌게 돼있는 장관이 현안을 어떻게 풀고 어떤 정책결정을 할수 있겠는가.

셋째로 선거공약과 정치인의 말에 대한 책임문제다. 얼마전 대선공약으로
대통령직을 걸고 쌀개방을 막겠다는 문안을 작성해 김영삼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든 사람은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쌀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니까 쌀공약의 허구성이 부각
되었지만 지난 대선이나 총선때 쏟아놓은 말과 공약을 조용히 되훑어 보면
실소를 금할길이 없다. 선거란 출마한 사람들이 유권자들을 흘리고 유권자
들도 그 흘림에 빠져드는 한바탕 마술과 같은 것인지 몰라도 강이 없는데
다리를 놓겠다는 말에도 박수를 친다.

선거철엔 불양상품이라도 포장을 잘하고 선전만 잘하면 먹혀든다. 낙선
되면 내세운 공약에 대해 책임질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당선된다 해도
유권자들이 그걸 챙기려들지 않는다.

그래서 선거때엔 말이 되지 않는 말이 오간다. 그게 지금까지 우리의
정치판이었다. 김영삼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발언은 앞으로의 정치발전을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사회가 정치지도자의 말에 대해 책임을 묻고 정치지도자는 책임을
지는 계기가 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술용어는 해석을 달리 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기 위해 뜻이 분명한 단어
를 사용해야 한다. 국제협상이나 외교에서는 서로 다른 해석을 할수
있도록,그래서 많은 걸 상대방에게서 얻어냈다는 걸 국민에게 자랑할수
있도록 애매모호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지난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쌀(rice)이라는 말이 언급되었느냐 하는 문제로
국내에서 떠들썩했지만 외교에서 쓰인 말이 학술용어처럼 분명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외교에서는 그렇다 해도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정치지도자의 말은 분명해야
한다. 일시적 인기보다 국민에게 땀을 요구하는 용기있는 말이 경제를
살린다. 어떤 경제문제든 그 해결에는 누군가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아무에게도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고 경제문제를 풀어가려는 것은 잘못이고
거짓말이다. 그 능력에 걸맞게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것이 바로 개혁이다.

새 내각은 개혁이냐 경제냐를 시비해서는 안된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올바른 정책을 합리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개혁이요,경쟁력
강화의 길이다.

류동길 <숭실대 중소기업대학원장>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