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2월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보니 내가만든 제1차5계년계획
초안속의 공장건설계회이 제철공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차질없이 추진되어
공장으로부터 생산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때 벌써 GNP
(국민총생산)성장률이 10%에 달하는등 우리경제는 고도성장궤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신봉하는 세이의 법칙대로 "생산증가,즉 공급증가가 수요증가를
유발시키는"확대재생산 체제에 들어선 것이다.

수출은 1961년 4천90만달러에서 64년 1백20만달러로 3년만에 3배가
증가했고 67년에는 3백20만달러로 5년간 수출이 8배 증가하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국산품은 품질이 낮고 값도 비싸 요즘말로 국제경쟁력이 형편없었다.
이런 국산품의 수출이 늘수있었던 것은 첫째,환율을 대폭 절상시켜 수출을
하면 국내시판보다 수익성이 높도록했고 둘째,수출금융을 충분히 늘려
수출을 하면 돈걱정을 안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 수출금융이자를
일반제출금리보다 싸게해 수출품생산 원가가 내수품 제조원가보다
저렴하게 해줌으로써 수출만하면 이익이 나도록 했다.

정부의 강력한 수출지원정책은 기업의 본질인 "돈벌기 위해서는"
"수출해야"한다는 기업풍토를 단번에 조성했다. 기업이 수출안한다고
책망만 하고있을 것이 아니라 "수출하면 돈벌수있게"정부가 지원 정책들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것은 지금도 통하는 얘기다.

나는 조사1부 조사역으로 발령받았지만 소속과가 없어 일거리가 없었다.
그때 한국은행사정이 인사적채로 조사1부에만 김종섭씨(수출입은행감사)
하영기씨(한은총재역임)그리고 김용권씨(외환은행 LA지점장역임)까지
부장밑에 차장이 셋이나 돼 나를 또 차장으로 발령낼수 없는 처지였다.

얼마있다가 송인상한국개발협회 회장으로부터 한국경제의 "실효보호율"을
계획해 줄수없는 나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송인상회장이 부흥부장관시절 나를 AID연수원에 보내주신 은혜를
갚기위해서도 이 일을 해야했기에 안상국씨 최명걸씨등과 같이 작업을
시작해서 6개월만에 완성했다.

이 일은 유솜의 데이비드 콜 박사와 로버트 존슨씨가 "한국에는
투입산출(IO)표를 만든 전문가들이 있으리 할수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
협회가 연구용역을 받게 된 것이었다.

유솜에서는 가장 최신학설에 따른 한국의 실효관세보호율을 현대관세율을
적용,10표에 대입해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좋아한다. 나는 이 작업을
"한국산업의 유효관세율"(Effectiu Protctive Rats of Korean
lndustry)이라고 이름지었다.

최명걸씨가 안상국씨와 같이 가장 수고를 많이했다. 이 계산모형을 갖고
관세율을 올였을때와 내렸을때 어떤 특정산업에 미치는 부가가치와 고용에
주는 효과를 수치로 계측할수 있어 그후 관세행정에 유효하게 사용되어
왔다.

이일을 끝내고 한숨 돌리려 했을때 이상호부장이 내방에 와서 "65년 기준
물가지수 개편작업이 지지부진하니 맡아서 해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방을
따로 만들어 물가조사과 직원 몇명을 차불받아 57년에 헤본대로
가중치계산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67년 1월1일자로 외환은행이 한국은행
직원중 희망자를 받아 발족했다.

내위에 차장으로 있던 세분이 모두 외환은행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나는
외환고무경험도 없고해서 세로발족하는 외환은행에 지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행스럽게도 조사1부차장 발령을 받을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위의 조사부장이 공석이되고 세로 이사가 된
백명원씨가 조사 부장 위촉을 받게돼 조사부장의 전용짚차를 내가 타게되는
어처구니없는 특별대우를 받게 됐다.

직함을 차장이나 실질적으로 제1조사부장 역할을 하도록 김세 당시 총재가
특별배려를 한것을 나중에 알고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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