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초기에 하와이의 오아후섬에 일본군포로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진주만 기습공격에 참가한 일본군 수십명이 이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죽어서 돌아오겠다"고 기약하고 전투에 참가한 "황군의 병사"
들은 생포된 뒤에도 죽음만을 고집, 미군측에 저항했다.

포로수용소는 어느날밤 식사 거부로 버티는 일본군인들에게 베토벤의
"황제"를 들려주었다. 일본의 전통민요만 들어온 일본군인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가 고개를 깊숙이 파 묻은채 "황제"의 긴 곡을 들었다.
곡이 끝나자 한 젊은 비행사가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는 서양음악에는
문외한이지만 오늘밤 이 음악을 듣고 삶이란 헤아릴수 없이 존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아서 숨쉬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멋있는 존재인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하와이 전쟁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 일군의 수기).

"결사"만을 고집해온 한 젊은이가 삶의 존엄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 일본
군인은 "죽음의 논리"를 버리고 "삶의 논리"를 택해 전쟁이 끝날때까지
수용소안에서 심신을 단련했고 전후에 귀국했다.

"쌀개방"문제가 절대 불가로부터 도리없는 불가피로 급선회하자 지난
주말부터 전국의 농민들이 쌀개방 "결사 반대"란 머리띠를 두르고 데모에
들어갔다. 엊그제 있었던 김영삼대통령의 개방저지 실패에 대한 대국민
사과성명이 있은 다음날인 10일아침까지도 서울 도심에 있는 어느 고층건물
에는 "쌀개방 결사 저지"란 대형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붉은 페인트
글자의 "결사"라는 다짐이 겨울비에 젖어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은 비장
하다기 보다 서글퍼 보였다.

"결사"란 말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강한 결의를 담은 말이겠지만 "결사"
운운의 표어들은 한결같이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애용해온 "결사특공대"
"결사보국"등과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듯하여 문민시대와는 호흡이 맞지
않는 살벌한 느낌이다.

"목숨을 건다"는 말은 생명을 중시하는 것으로 들리기도하나 실은 생명
경시와 직결된다. 죽음은 엄숙한 것이지만 삶이야말로 더욱 존엄한 것
이기에 말이다.

"죽어서 책임을 진다"거나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외쳐대는 사람들보다
살아서 책임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들의 다짐이 더욱 절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