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추는 형인 영가군 권경의 첩의딸을 간통하여 처로 삼아 살고 있으니
강상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추국하소서" 성종4년(1473)12월1일 한명회의
보고를 받은 임금은 몹시 놀랐다. 동생이 형의 딸을 간통했다니
동방예의지국에서 있을 법이나 한 일인가. 말만들어도 귀를 씻어야 할
판이었다. 더구나 3대째 공신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권경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니 아연해 질수밖에 없었다.

권경(1429~1482)은 조선조초의 명신이자 대학자였던 양촌 권근의 손자요
우찬성 권 의 아들이었고,세조때 우의정을 지낸 권람의 친동생이었다.
그가 비록 과거 아닌 문벌로 관직에 올라 학식은 변변치 못했지만 어찌
아우와 딸이 간통하는데 이르도록 가풍을 더럽혀 놓았다는 말인가.

성종은 의금부에서 권경의 아우 권추를 추국한 안을 가져오도록해 그가
진술한 내용을 낱낱이 살펴 보았다. 권경의 첩이었던 동백은 권경과
상종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김장수라는 자와도 불윤의 관계를 맺고 있어
그녀의 소생인 동비가 누구의 딸인가 조차 판별하기 어려웠다. 성종은
권경을 직접 불러들여 물었다.

권경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동비가 자기의 딸이 아니라고 딱잡아 뗐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 어미와 간통했을때 김장수 또한 간통했기 때문"
이라고만 우겼다.

동비가 누구의 딸인지를 가려내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동비의
생년월일을 따져보고 어미인 동백의 증언까지 들은 임금은 동비가
김장수의 딸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려 버렸다. 진실이야 어떻든 공신을
사죄에 처하도록 하는것 보다는 그렇게 해결해 버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사건이 마무리지어졌으면 좋았을텐데 사태는 그렇지 못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권경의 어머니와 동생 노비들은 모두
동비를 권경의 딸이라고 믿고 있었다. 또 동비를 기른 것은 권경의
누이였다는 사실도 밝혀졌고 애당초 동비와 동생이 같이 산다고 소문을
낸 것도 권경이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의금부에서 관련자들을 다시 추국한 결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권경의 아버지 권제는 서얼출신인 권추를 권경보다 총애했다. 그래서
죽을때 권추에게 더 많은 전답과 노비를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권경은
아버지 권제가 죽자 동생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그러자 권추는
형을 관아에 고발했고 이 송사에서 권경이 패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분통이 터진 권경은 그때부터 거짓으로 수양딸인 동비가 자기의 친딸
이라고 우기면서 아우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몰래 소문을 퍼뜨려
임금의 귀에 까지 이 소문이 들어가도록 잔꾀를 부렸다.

조정이 온통 시끄러워졌다. 사헌부 대사헌 이예가 소를 올려 권경을
준엄하게 탄핵했다.

"권경이 항상 아비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유감을 풀려하였으니 아비를
업신여긴 죄가 뚜렷하고 그럴싸한 말을 요란히 전파하여 그 아우를 죽이려
하였으니 우애하지 않은 죄가 명백하며 임금을 속이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가 뚜렷합니다" 권경을 부효 불목 부충의 죄로
논핵한 이예는 "권경을 춘추의 법으로 결단하여 훈적에서 삭제하고 작위를
빼앗아 먼 지방으로 내쳐서 한나라의 이목을 쾌하게 하고 만세의 강상을
부지하도록 해야한다"고 중죄로 다스릴것을 촉구했다.

빗발치듯하는 상소공세를 받은 성종은 권경의 직첩을 거두고 파직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같은 핏줄은 아니라고 해도 형의 수양딸을 범한 아우권추도 죽을
죄만을 겨우 면해 직첩을 빼앗기고 외방으로 귀양가는 신세가 됐다.

가엾은 동비는 관비가 되었다고 "성종실록"에는 분명히 기록돼있다.
명문가에 비극을 몰아온 이사건의 근본원인은 물욕에 눈이 멀어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짐승처럼 인륜을 잃어 버린 권경 권추라는 이복
형제의 잘못된 가치관이랄수 밖에 없다.

부모 형제에 대한 사랑(친친)이 확대되어 이웃사랑(인민)으로 뻗어가고
이 사랑이 다시 자연에까지 이르러 일체감을 이루는 (애물)것이 최고의
이상이었던 유교국가의 지도층에도 이런 소인배들이 많아 가끔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1473년 12월에 있었던 일이니 지금부터 꼭 5백20년전의
이야기다.

<부국장대우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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