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김기웅특파원]김영삼 대통령의 방미 8박9일. 그것은 차라리
"강행군"이라 불릴만 했다.

서울-로스앤젤레스-시애틀-워싱턴을 연결하는 숨막히는 일정속에서 많은
수행원들은 입술이 부르텄다.

23일(현지시간) 백악관 정상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장에 나온 김대통령과
공식수행원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건강해 보이는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었다.

김대통령의 첫 해외나들이인 이번 방미는 사실 계획단계에서부터 사뭇
"개혁적"이었다.

우선 공식 비공식수행원의 수를 대폭 줄였다. 특별 전세기의 개조규모도
최소화해 경비를 아꼈다. 과거 대동해온 기업인들도 일절 방미대열에
참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개혁적인 대목이 있다. "철저히 일 중심으로 계획을
세우라"는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짜여진 "숨돌릴 틈 없는 일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 5~6건씩의 크고 작은 행사를 모두 30여차례의 면담및 회의참석
스케줄로 소화해야 했다.

아.태경제협력체(APEC)지도자경제회의,한미.한중정상회담등 그 하나하나의
내용도 비중있고 내실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대통령의 해외나들이에
관례화 되어있던 "휴식 스케줄"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캐나다 밴쿠버나 앵커리지에서 하루 여유를 가질것을 검토한 적이 있으나
김대통령의 직접지시로 백지화 됐다.

이처럼 "개혁적"으로 출발한 김대통령의 방미는 그래서 "강행군"의
고통만큼 알찬 결실이 있었다는 평가다. 성과의 내용들을 두서없이 짚어
보면 대충 이런것들이다.

첫째 문민정부로 면모를 일신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세계13개국 정상이 참여한 APEC회의에서 김대통령은 발제연설을했다.
APEC지도자회의의 정례화를 제안해 회원국들의 동의를 받아내기도했다.

현지 미국언론은 이번회의의 참여인사중 클린턴 미대통령,강택민중국
국가주석,호소카와일본총리와 함께 김대통령을 비중있는 4대인물로 꼽았다.
클린턴대통령의 각별한 호의속에 김대통령의 발언은 듬직한 무게가 실려
전달됐다.

둘째 역대 대통령의 외유행사가운데 가장 경제적이고 실질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김대통령은 취임후 지금까지 내치에 주력해왔다. 개혁의 확산,깨끗한
문민정부의 실현에 전력투구했다. 외국정상의 방한이 러시를 이루었지만
자신의 해외방문일정은 뒤로 미루어 놓았다.

그러나 이번 방미를 통해 김대통령은 여러정상을 한꺼번에 만났다.
클린턴 미대통령은 물론 강택민 중국국가주석과의 만남도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새로 출범한 크레티앙 캐나다총리,키팅 호주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것도 마찬가지다. 수하르토 라모스등 우리와 가까운
아세안 주요국가 정상들과 만나 우의를 다진것또한 출범 9개월만에
이루어진 첫 외유였음을 감안하면 여간 값진 일이 아니다.

세째 한미간의 맹방적 우호관계를 다졌다는 점도 주목되는 성과다.
더구나 북한핵문제는 현재 국제사회의 핫이슈가 되고있다. 한반도 주변에
전쟁기류가 흐르고있다는 분석과 함께 그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런때 한미정상이 실제 핵문제대응전략과 한반도 안보문제에
일치된 한목소리를 내게된것은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김대통령이 방미 첫 기착지를 로스앤젤레스로 정하고 가는곳마다 가장
먼저 교민들을 만난 행보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지금 미국의 우리
교민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위축되어있는 상황이다. 로스앤젤레스흑인폭동
사태로 인해 한인상권이 위축되고 미국의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 교포도 많다.

이럴때 대통령이 그들을 찾아 위로하고 그들의 뒤에 조국이 있음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더구나 김대통령의 이번 방미기간동안에는 과거에 늘상있었던 숙소나
공항주변의 "반정부"시위가 거의 눈에띄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정체모호한 단체가 "친북"성향의 피켓시위를 주도한적이 있었으나
참가인원은 20여명에 불과했다. 미국을 방문한 한국대통령이 숙소인
호텔의 정문으로 통행한 경우는 지난 수십년이래 처음이었다는 것이
미국측 경호관의 설명이기도 하다. 문민정부 문민대통령의 당당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개혁적이고 내실이 돋보인 이번 방미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예를들면 너무 타이트한 일정으로 각 행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다소
미흡했다는 느낌이 없지않다.

김대통령 자신도 워싱턴의 마지막날인 23일 오후(한국시간 24일새벽)가진
동행기자 간담회에서 "나자신 정신이 멍해진 상태"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의욕"이 앞선 타이트한 일정탓일게다.

새정부들어 첫번째 외유였던 만큼 일부행사준비에 차질도 있었다.
여기에는 비공식 수행인원이 워낙 적어 다소 소홀함이 불가피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들이 큰 문제는 아니다. 대통령의 다음번 외유때는
충분히 보완될수 있는 성질이다.

김대통령은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귀로에 앵커리지에 잠시
기착, 현지교민들과 만나는 일정을 갖고있다.

8박9일이라지만 비행기에서 지샌 시간들을 빼면 겨우 6일 남짓. "그 짧은
기간동안 많은 일을 치른 기억밖에 없다"고 한 수행원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