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도료산업은 그산업화가 늦은만큼 그 출발점도 늦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일본 도료상들에 의해 도료가 보급됐고 국내본에 의한
<>도료업체도 영세규모로 존재했지만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업체는 없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접할수 있는 페인트가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한것은 50년대이후 애기가 된다. 우리나라 도료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한것은 해방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관 25세의 한정대가
<>''대한오프세틔 잉크제조공사''를 세운것은 45년10월이었다. 이회사가
<>바로 대한페이트잉크의 전신. 대한오프세트잉크는 인쇄잉크를
<>만들었지만 잉크와 도료의 제조노하우가 비슷해 이회사를 민족자본에
<>의한 첫도료업체로 꼽는다.

함흥출신의 한정대가 대한오프세트잉크를 세운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그의 개인이력에서 연유한다. 한정대는 오사카공고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오사카의 후지(부사)화학연구소에서 기사로 일하던중 해방을
맞았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조국건설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한다.
그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 이는 외사촌형인 임병철씨.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임씨는 "건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교육이며
이를위한 출판물 인쇄가 긴요하다"고 충고한다. 화학을 전공한 그에게
이얘기는 곧 잉크를 만들어보라는 얘기로 들렸다. 더구나 잉크제조는
소자본으로 시작할수 있어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한정대에겐 안성맞춤
이었다.

대한오프세트잉크라는 간판을 처음 내건 곳은 서울 회현동1가34의4
일본식 목조가옥. 이건물은 일본인 소유였었지만 당시에는 일인재산을
먼저 차지하면 임자가 되는 시절인지라 공장터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사업자금 마련이 손쉽지 않았다. 25세 약관의 나이로
한정대는 조선은행(한국은행전신)에 찾아가 당시돈 50만원의 대부를
요청한다. 조선은행측은 한정대의 이같은 행동이 당돌했지만 그 패기를
믿고 50만원을 대부해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회현동공장에 22인치 삼본롤밀 한대와 놋쇠솥 드럼통
나무막대등을 설치,엉성하지만 잉크공장을 가동시키게 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잉크를 담을 그릇이 없어 판매를 할수 없었다. 그래서 한정대가
착안한 것이 커피캔이었다. 해방과함께 진주한 미군에 의해 커피통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직원들이 리어카로 시내의 다방들을 돌며 커피통을
수거하러다니는 것이 일과였을 정도.

창업전선은 이렇게 우여곡절을 넘나드는 것이었다. 이해에 지폐용
잉크를 개발,조선은행발행의 지폐 교과서등에 국산잉크를 처녀납품하게
됐다. 47년에는 녹색안료의 조성에 성공,녹색잉크생산의 장을 열었다.

각종 잉크류를 생산하면서 대한오프세트잉크는 기술력을 축적해 나갔다.

대한오프세트잉크가 본격적인 도료사업에 뛰어든 것은 6.25동란이후다.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조흥페인트 대양도료 동일페인트 건설화학등이,
그리고 대구의 애국공사등이 도료생산에 나서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전쟁뒤끝이라 군수요뿐만아니라 민간수요도 늘어났으나 시설
기술 원료의 부족으로 수요를 따르지는 못했다. 56년 상호를
대한잉크제조로 바꾸면서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이해에 인쇄잉크제조
기술을 이용하여 국내처음 미연방규격의 조합페인트(READY MIXED PAINT)를
개발, 생산에 나선다. 57년에는 "노루표"상표를 처음 선보였다.

대한잉크제조가 내외에 품질을 인정받고 도료업계에 간판을 내밀수
있었던것은 미군납이 실마리가 됐다. 이회사가 도료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시기인 50년대말 국내 도료생산능력은 연간 3만t에 달했으나
수요는 4천t에 불과했다. 한사장은 품질도 인정받고 시장또한 유망한
것이 군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미군납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도료기술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만해도 어느 도료업체도 미군에 납품하지 못했었다. 한사장은
내후성시험촉진기등 10만달러어치의 가드너시험기기를 들여와
미군관계자들에게 실험결과를 내보이는가하면 일본 요코하마화학연구소에
품질테스트를 의뢰, 합격판정을 이끌어내 결국 미군납을 시작하게됐다.
이때 "성조지"와 "포천"지는 노루표의 군납사실을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이후 다른 국내업체의 미군납길이 트이기 시작한것은 물론이다.
대한잉크제조는 58년부터 연간 1백만달러어치를 미군에 납품하게 된다.
회사몸집이 커지게된 계기가 됐다.

대한은 60년대초 삼천리자전거에 도장되던 자전거용 도료를 개발했고
62년에는 정부의 자동차공업보호법을 배경으로 설립된 새나라자동차에
자동차용 도료를 처녀납품하면서 국내자동차용 도료생산의 새장을 열었다.

66년에는 일본페인트와 도료제조기술제휴를 체결했는데 이는 도료업계
최초의 외국기술 도입으로 꼽힌다. 이회사는 60년대후반들어 합판용
도료 수요폭증과 새마을사업에 따른 슬레이트용도료수요등의 증가로
외형성장을 거듭해왔다.

89년 대한페인트잉크로 상호를 바꿨음며 지금은 경기도 안양에
5만평규모의 대규모공장에서 연간 1천억원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대한인터내셔널 대한보스틱 대협 프라코등
자회사를 거느린 중견 화학회사로 거듭나고있다.

<남궁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