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의 물가지수 매뉴얼을 해득한후 전직원을 동원해서 품목별 생산통계와
수입통계를 수집하고 수량과 단가조사에 착수했다.

55년 당시 품목별생산통계를 총망라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정부 각부처에서 나오는 행정통계,각종 협회에서 업무용으로 수집한
생산통계,세무행정통계 등을 직원을 독려해서 조사수집 하느라 진땀을
뺐으나 4개월 여의 작업끝에 겨우 잡다한 기초통계자료를 모을수 있었다.

그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통계자료를 만든다는 것이 어렵기는 해도
하면되는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을수 있었다.

수집한 기초통계자료를 갖고 1백99개의 품목에 대한 가중치를 계산해 내는
것 또한 힘든 고비였다.

"밥그릇" "종지" "접시"등 도자기 제품중에서 대표가 되는 물가조사 품목
을 "직경 15cm의 접시"(행남사제품)으로 정하면 나머지 도자기제품의 가격은
이 대표상품의 값과 동일하게 변동한다고 간주,식기류 도자기전체의 중요도
를 그 대표상품에 "인푸트"해서 가중치를 산정했다.

직경 15 의 접시가 식기류 도자기 제품전체의 물가변동을 대표한다는
뜻이다.

방대한 기초자료와 손으로 돌리는 계산기 주판등으로 밤늦게까지 작업을
한 결과 58년2월 , 작업시작 6개월만에 55년을 기준으로 하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물가지수를 발표할수 있었다.

처음 해보는 물가지수 개편작업을 통해 나는 조사연구업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암중모색"작업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그때 하국은행조사부는 기획조사과 통계조사과 2과 3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기획조사과에 가장 인재가 많았고 당시 조사월보에 글을 쓰는 조사
역들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중엔 정부관료로 스카우트되어
출세한 사람들도 많았다. 김정제 송정범같은 분들이 그 대표적인물이다.

조사1과는 금융통계,조사2과는 물가와 생계비조사,조사3과는 산업조사로
그 업무가 분장돼 있었다.

나는 기획조사과엔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과 그밖에 유능한 인재가 많은데
왜 하필 조사부 경험도 없는 나를, 그것도 물가지수 근대화개편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시키기위해 불렀는지 의문을 갖고있었다.

이상호차장이 작업이 완료된후 새로운 물가지수를 총재에게 보고하고 나서
만족한표정으로 "박조사역 수고했어,내가 박조사역을 잘 기용했지"라고
칭찬하며 그분만의 독특한 웃음을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해방후 대구지점에 근무할때 조사담당행원으로서 한국은행조사부 논문모집
에 응모해 가작상을 받은것이 인연이되어 그당시 한국은행법의 국회통과에
공이컸던 장기영조사부 당시차장을 알게 되었다.

특히 6.25동란 발발직후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오신 장기영당시 한국은행
부총재의 삼촌되시는분이 다시 부산으로 피란갈때까지 나의 집에서 같이
지낸 인연도 있었다.

후일 장기영씨가 한국일보사장과 부총리겸경제기획원장관시절 자주
전화통화를 하고 면담기회를 가질수 있었던 인연도 그래서 생긴것이다.

나는 물가지수개편작업을 했기 때문에 "물가전문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그후 정부 각부처에 자주 출입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91년7월 산업연구원(KIET)원장직을 임기만료로 그만둘때까지
33년간 정부에 무상출입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것이다.

당시의 송인상부흥부장관이 나를 자주 불러서 물가동향을 보고받고 미국
AID통계 연수원으로 유학갈수있는 기회를 준데 대한 고마움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