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 대구지점이 한국은행으로 바뀌게된것은 한국은행법이 국회에서
입법공포된 직후인 1950년6월12일이다.

다른도시도 다 그랬지만 해방후 대구에서도 남노당이 극성을 부리던
사상적 혼란기가 한동한 이어졌다.

그당시 나도 한번은 대구지점파업에 가담했다가 경찰서에 잡혀가 목검으로
두들겨맞아 등에 뱀이 기어간 가국같은 멍이 들기도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이 한국은행 대구지점으로 바뀌어 명실공히 한국의
중앙은행 이 된지 불과 며칠후 6.25동란이 발발했다.

당시의 한국은행 구용서총재와 장기영부총재등 본점 수뇌간부들이
한강철교 폭파직전에 탈출, 대구지점으로 왔다가 다시 부산으로 옮겨가는
등 전세는 점점 나빠졌다. 대구까지 포탄이 날아와 떨어지자 피신하라는
직장동료의 귀띔을 받고 나는 대구에 살던 고모님댁 다락에 숨었다.
경찰이 예비검속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의심받던 사람들이
예비검속에 걸려 처행되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 북새통에 억울하게 화를 당할지 모르기때문에 당시 배제인지점장
(한은이사역임)은 대구지점 직원가족을 미리 대피시켜 부산으로 가도록
했다. 나도 배지점장의 배려로 부산 피난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나는 인천지점으로 전근됐으나
1.4후퇴를 맞았다. 부임하자마자 인천지점전직원은 가족과 같이
미군화물선(LST)에 승선,3천여명의 피난민들과 갑판위에서 아비규환의
자리다툼을 벌이며 20시간의 긴 항해끝에 부산에 도착할수 있었다. 한동안
사무실 책상위에서 새우 잠을 자며 지내던 일,길에서 징병으로 잡혀갈뻔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쟁비용 때문에 남발된 통화에다 서울본점에 두고온 미발행 은행권을
북괴군이 마구잡이로 사용,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랐다.

1954년 2월17일 1백대1의 통화개혁조치가 단행된것은 이때문이다.

통화조치직후 나는 영하 7~10도의 엄동설한에 부산에서 트럭에 신지폐를
싣고 경관 2명과 인천지점 직원 몇명과 함께 전주로 갔다. 양말 세켤레를
껴신고 군화를 신은데다 방한 파카를 뒤집어 썼지만 쌩쌩 달리는
트럭위에서 세시간을 지나자 발과손,그리고 얼굴이 내살같지 않게 얼어
붙었다.

국도를 따라 약18시간을 달려 대전지점에 도착하니 겨우 살것 같았다.

다음날 목적지인 전주지점에 도착, 현금 수송을 끝내고 다시 다음날
그차에 또 현금을 싣고 지이산 장수읍으로 갔다.

장수금융조합에서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해준후 나머지는 금융조합에서
긴급명령대로 통화교환을 하도록 당부하고 전주로 되돌아 왔다. 본부
지시에 따라 전주도착 다음날 바로 목포로 갔는데 거기서 아찔한 비보를
접했다.

우리가 떠난 다음날 장수읍 금융조합이 지리산 공비들에게 습격을 당해
우리를 경호해주던 주재소(지금의 파출소)경찰관 전원과 금융조합이사,
숙직하던 직원등이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지리산 공비들이 통화조치를
위해 화폐를 갖고간 우리를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날짜를 잘못알고 우리를
습격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되자 몸이 오싹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일본군에서의 전사위험, 빨갱이예비검속,지리산공비습격,그리고 지난
83년10월9일 아웅산사건에서도 사신이 나를 피해 갔으니 나의 운도
어지간히 질긴편이라고 생각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