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가 실시된지 12일로 석달째를 맞는다. 당초 우려와는 달리
금융시장이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일반 국민들중 상당수는 실명제
고통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지 않아 "일단 뿌리를 내리는듯하다"는게
정부의 평가다.

그러나 투자수요가 메말라 경기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고 중소기업의 부도
는 크게 늘어나는등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않다는게 업계의 지적
이다. 게다가 풀린 통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물가를 자극할 우려가 높고
부분적으로는"돈을 쓰고 보자"는 사치풍조마저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금융
거래의 실명화로 베일에 가려있던 과세자료가 노출돼 내년이후 세금부담
증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금융시장상황으로만 보면 실명제의 단기충격은 어느정도 가시고 있다.
회사채유통수익률이 실명제전인 지난 7월말 연13.25%에서 실명제시행직후인
8월말 연 14.36%로 올랐으나 점차 안정세를 보여 10일현재 연13%를
기록하고 있다. 2단계금리자유화조치가 시행됐음에도 금융시장은 비교적
평온한 편이다.

그러나 이는 실명제가 정착돼서라기 보다는 엄청난 돈을 풀었고 기업들이
잔뜩 움츠려 투자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지난 9월만해도
총통화증가율이 전년동기대비 연21.4%로 치솟았다. 한은은 이렇게 많이
풀린 돈을 점차적으로 빨아들이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내년이후 물가를
자극할 것으로 우려된다.

기업들은 세계적으로 경기가 나쁜 탓이기도 하지만 투자를 하지않아
문제로 지적된다. 단자사들은 어음할인(여신)금리를 낮추어가면서 일부
기업에 돈을 쓰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억지로 돈을 빌린 일부 기업들은 그
돈으로 은행에서 끌어다 쓴 당좌대출을 갚아나가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기업의 자금사정이 좋은 것은 물론 아니다. 한계상황에
몰린 중소기업,부분적으로는 중견기업까지도 속속 쓰러지고 있다. 지난
10월 서울지역 부도업체는 3백88개로 올들어 최고 수준에 달했다. 중규모
기업인 도투락 장복건설등도 부도를 냈다.

과세자료양성화로 인한 세금부담증가는 앞으로 더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정부는 이번 정기국회에 낸 세법개정안에 법인세율을 2%포인트
낮추고 부가가치세 경감조치도 마련했으나 관련 업계에서는 추가적인
인하를 요구하고있다. 실명제로 인한 세금부담이 누증될 경우 가뜩이나
부진한 경제여건에서 버티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자당에서도 이를
의식,추가세율인하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국회의 세법심의과정에서
그결과가 주목된다.

실명제로 갖고있는 돈이 투명하게 드러나느니 차라리 써버리는게 낫다는
실망형소비도 나타나 고급술집이 호황을 누리고 고급승용차가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실명제부작용의 한 편린이라고 볼수있는 이같은 소비행태의
개선도 필요한 시점이다.

<고광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