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은 만인을 위해,만인은 1인을 위해" 협동조합의 원리를 간결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약자들이 한데모여 서로돕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사업을 벌여 가는 조직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오늘날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대변히고 공동판매와 원자재 공동구매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소기업협동조합은 지난 62년 이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61년말 제정 공포된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을 근거로 62년 2월20일 고추장
된장 간장을 만드는 업체들이 처음으로 창립총회를 갖고 장류조합을
출범시킨게 중기조합의 효시(설립인가 기준으론 자동차조합이 처음임)이다.

며칠뒤 자동차 농기구조합이 설립됐고 3월엔 고무 페인트잉크 합성수지
비누업체등이 조합결성에 나섰다.

5월까지 불과 3개월새 생긴 조합이 36개에 이른다.

이같이 조합이 잇달아 발족된 것은 전해에 출범한 혁명정부가 중소기업을
조직화해 육성하고 통제하는데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단체는 물론 60년대 이전에도 있었다. 성냥협회 연탄협회 과자
협회 연필협회등 수십개의 협회나 연합회가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임의
단체였을 뿐아니라 활동도 미약했다.

따라서 중소기업들은 구심점역할을 할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50년대
후반부터 조직구성과 권익옹호를 위해 뛰기 시작했고 그결과 기협법이
제정된 것이다.

기존 중소기업관련단체는 모두 해산되고 협동조합형태로 통일됐다.

조합의 중앙단체인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약칭 기협)는 62년5월14일
서울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36개조합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했다.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축사를 박태준 상공위원이, 상공장관 축사는
박충훈 차관이 각각 대독한 가운데 열린 이날 총회에서 초년도 예산으로
2백90만2천원을 확정했다.

또 초대회장에 이구종 제지조합 이사장을,부회장에 이성진 계량기 조합
이사장과 박덕신 고무조합 이사장을 선임했다.

이사로는 용이식 금속조합이사장 한정대 페인트잉크조합이사장 류기정
인쇄연합회회장등 17명이, 감사는 이상무 구루타민산소다조합이사장등이
선임됐다.

기협은 첫 살림살이를 서울 종로구 관철동 181 약공회관 2층 단칸셋방에
꾸렸다.

당초 9명의 상근인원을 두기로 했으나 재정형편이 어려워 전무 총무과장
경리담당직원등 모두 3명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대신 김병원 금융통화운영위원 박동규 중소기업은행장을 고문으로 추대해
업무추진에 도움을 받았다.

기협의 첫 활동은 통화개혁조치로 동결된 자금을 풀어줄 것을 건의한
것이었다.

당시 중소기업은 통화개혁과 대출동결로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해 있었다.
기협은 협동조합원업체에 한해 동결자금을 전액 풀어줄 것을 건의했고
정부는 이를 허락했다.

첫 활동이 성공을 거둔 것. 비록 미약한 힘이지만 한데 합쳐 노력하니
일이 이뤄지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어 중소기업이 발전하려면 기업인들의 의식이 깨어야한다고 보고
실력있는 대학교수를 초빙해 중소기업지도자강습회도 열었다.

또 업체들의 시급한 과제가 생산제품의 판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
이라고 보고 공동판매 사업을 개발하는데 주력했다.

대기업에 비해 생산시설이 뒤지고 조직도 약한 중소기업은 공동으로
정부기관등에 납품하는 것이 판로확보의 지름길이었다.

이에 여러차례 정부에 건의하고 노력한 끝에 65년에 처음으로 21개조합이
1백81개품목을 단체수의계약방식으로 정부기관에 납품할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기협활동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부시책이 중소기업육성에 역행한다고 판단할 때는 비상수단도 서슴지
않고 동원했다.

66년 발생한 "9.21자폭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정부는 67년도 예산을 편성하면서 장기저리의 중소기업육성시책자금
15억원을 전액 삭감하고 대신 금융자금으로 이를 전환했다.

이에 분개한 중소기업인들은 기협을 통해 처음으로 정부와 국회등에
탄원서와 청원서를 잇달아 제출하며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관철되지 않자
이구종회장을 비롯한 전임원이 9월20일 임시총회에서 사퇴를 결의하고
이튿날 행동으로 옮긴 사태가 빚어졌다.

이 사태를 계기로 3대를 연임한 이회장이 퇴진하고 4대회장에 여상원씨가
취임한다.

기협은 태평로의 감리회관 신문로의 세종빌딩으로 옮겨다니다 67년
공평동에 자체건물을 마련해 셋방살이의 설움에서 벗어났다.

공평동회관은 87년 여의도에 번듯한 현대식 건물을 지어 이사하기까지
20년동안 중소기업운동의 요람이었다.

중소기업의 공동이용 시설 설치,고유업종제 도입,경제4단체로서의 위상
확립,ISBC(중소기업국제회의)등 국제회의참가를 통한 해외교류확대등이
이 시절에 이뤄낸 성과이다.

현재 기협은 1백억원에 이르는 연간예산에 2백50여명의 임직원을 둔
조직으로 발돋움했고 산하 조합도 약 6백개에 이르는 명실상부한 중소
기업의 본산으로 자리잡았다.

<김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