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포니차를 만드느라고 밤을 새워가며 고생하던 분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 현재 현대자동차 사장및 자동차공업협회장을 맡고있는 전성원씨
,현대자동차 부사장인 노관호씨,기술센터소장 이충구씨등이 있다.

전씨는 71년 기획관리실에서 차장급으로 포니차의 개발과 생산을 총 지휘
했고 노씨는 판매담당차장으로 판로확장과 수출개척에 앞장섰으며 이씨는
품질관리부 사원으로 열심히 뛰었다.

또 특장차 생산담당차장인 강중신씨,공장총무부차장 김종중씨,고속버스
생산담당차장 문길웅씨,신차종 설비개선차장 이수찬씨,품질관리1부차장
이수호씨등은 현장에서 생산직으로 땀을 흘리던 공로자들이다.

포니의 탄생과 함께 각 자동차 조립공장의 성쇠가 큰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을때 정부는 부품공업의 국제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풀어가고 있었다.

74년도에 마련된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에는 부품공업진흥에 역점을
두었다. 자동차공업의 정착은 건전한 부품공업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부품공업 없는 조립공장이란 문자 그대로 사상누각이다.

당시의 부품공업은 유치원 단계여서 정부가 어머니 역할을 할수밖에
없었다. 부품공업을 육성해주어야 하고 대기업체인 모기업의 횡포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했다. 이 일을 정부에서 맡게되니 상공부로서는 힘겨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부품공업을 소형선박에 비유한다면 상공부는 항구의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74년 장기진흥계획"에서는 <>원칙적으로 부품 한 종류에 한 업체를 육성
하기로 하고 <>최신 대량 생산시설을 갖추기로 했으며 <>적극적으로 외국
유명 메이커와 합작 또는 기술제휴토록 유도하는 한편 <>정부가 적극 지원
하되 될수록 창원공업기지에 입주토록 했다. 75년 12월에는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중소기업 계열화 촉진법까지 제정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앞서 설명했듯이 현대는 종합자동차공장 건설계획서에
변속기(미션기어)와 후차축공장까지 포함시켜서 신청했는데 이런 분야는
부품제조업체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정부방침이었다.

정부는 현대자동차가 제출한 종합자동차공장 건설계약의 인가과정에서
"변속기 및 후차축 제조기술은 기존 또는 신설계열공장에 제공해야 하며,
신설공장의 경우는 기존업체와 공동출자로 창원기계공단에 건설토록 할것"
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74년3월2일 차관도입인가때도 "변속기 및 후차축공장 건설계획은 본 사업
계획에서 제외토록 하고 기존업체와 협의,별도 사업계획을 작성해 승인을
받을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에 대해 현대는 변속기 및 후차축은 자동차 생산업체가 자가생산하는
것이 국제적 통례이며,당사 자체수요만을 위한 생산규모로도 경제규모가
될수 있을뿐 아니라 특정사양에 의한 생산준비가 시급하므로 종합자동차
공장 건설사업에 포함해 조속추진될수 있도록 사업인가 조건을 해제해 줄
것을 여러차례 건의했다. 그러나 정부는 현대가 제조코자하는 소형승용차
변속기 및 후차축의 국산화를 위해서는 기술도입이 필요하나 기존의 전문
계열업체로 동양워너와 코리아 스파이서등 2개업체가 있으므로 이들 기존
업체가 기술도입계약을 맺도록 현대자동차가 알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못박고 말았다.

이런식으로 정부가 유도해 나가니 부품공업도 급신장하게 되었다. 동양
기계를 비롯한 대규모 부품공장들이 창원에 속속 건설되기 시작했다.
새로 창업하는 회사도 많았다. 새로 건설되는 공장은 모두 국제경쟁을
목표로 해서 지어나갔다. 또 외국유명회사와 합작 또는 기술제휴를 했다.
구미쪽이 많았다. 앞으로 일본과 수출경쟁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의 회원수는 75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늘어 갔고
자동차부품 수출도 크게 신장돼 갔다. 완성자동차 수출과 비례해서 부품
수출이 크게 늘어 81년에는 완성차및 부품수출액이 각각 1억달러를 돌파,
모두 2억3천만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윤승식과장(당시)의 회고를 들어본다. 스파크 플러그회사를 건설할 때의
일이다. 한국프러그(주)의 유홍우사장이 스파크 플러그를 국산화하기
위하여 일본의 NGK회사와 기술제휴를 하려고 했다.

스파크 플러그라는 것은 특수자기를 써야하며 특수한 기술이 필요한
것인데 NGK에서는 기술을 내놓으려고 하지않았다. 윤과장은 NGK회사의
간부를 초청했다. 얼마후 NGK의 쓰카모토생산기술부장과 유사장이 왔다.
윤과장은 일본말이 서툴러 유사장에게 통역을 하게했다.

쓰카모토부장은 한국에는 수요가 적으니 경제성이 없다는 설명을 하는등
매우 부정적이었다. 윤과장은 한국도 자동차공업이 발전될수 있다는
설명을 했는데 통역을 통하자니 의사가 잘통하는것 같지 않았다. 윤과장은
한문으로 "선행투자"라고 크게 써놓고는 볼펜을 갖고 그 글씨를 탁탁치며
"you know?you know?"했다.

윤과장은 우리나라의 자동차 부품공업 육성에 대해 설명하고 플러그제조에
협조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쓰카모토부장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간부회의때 "한국의 패기 넘치는 젊은
관리가 업자보다 앞장서서 한국의 자동차공업육성에 노력하고 있는데 대해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런 젊은 엘리트 관료의 열성에 보답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건의해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윤과장은 이런 일이 성취될
때가 가장 보람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스파크 플러그의 기술제휴가 이루어지고,각종 주변기술이 도입되어 국산
스파크 플러그가 나오기 시작했다. 스파크 플러그의 소재인 자기만은 수요
가 적어 (국산화할 경우 값이 3배나 더 먹히기 때문)공장을 건설치 않았다.
그후 NGK에서 33%를 직접투자,기술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주:한국프러그는 우진공업으로 상호를 바꾸었다. 유성기업의 방계회사)
최근에 필자와 만난 류회장(현재)은 그때 정부에서 적극 도와주지
않았다면 스파크 플러그의 국산화는 불가능했고,현재의 우진공업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자동차공업육성,특히 부품공업육성에 대한 정책이 없었던들 지금과
같은 한국의 자동차공업 자체가 이 세상에 존재치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제 지프차에 대해서 살펴보자. 본격적 군용 지프차는 방위산업부문에서
설명하기로하고 민수용에 대해서만 쓴다. 70년 필자가 차관보시절 장관을
대리해서 외자도입 심의회에 출석을 했을 때의 일이다. 신진에서는 민수용
지프를 생산키로 하고 공장건설 계획안을 당국에 내놓고 있었다.

지프라는 것은 원래 군용차로 이름 자체가 제너럴 퍼포스 트럭(general
purpose turck)이다. 즉 다목적 트럭으로서 용량은 4분의1 이다. 흔히들
제너럴 퍼포스 트럭이라고 부르기 힘들어 대문자만 따서 GP라고 불렀는데
GP가 지프(Jeep)로 변한것이다.

지프차는 승용차에 비해 값이 비싸다.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며 자동화
방식에 의한 대량생산을 할만한 물량이 못되기때문이었다. 신진이 이런
지프차를 생산해서 민수용으로 팔겠다는 것에 대해 얼른 이해가 안되었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 속셈이 있었다. 당시 자동차세는 꽤 많은
액수가 부과될 때였는데 지프차에 대해서는 세금을 싸게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유사시에 군용으로 징발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때 외자도입
심의회에서는 "세금까지 깎아주며 지프차를 생산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옥신각신했는데 신진의 입김이 강해서 원안대로 다수결로 통과돼 버렸다.

GM코리아의 출자회사인 신진은 GM코리아에서 손을 떼고난후 지프차
제조사업만 남게 되자 74년 미국의 AMC사와 50대50으로 합작하여 신진지프
(주)회사를 설립,지프차만 생산하게 되었다. 지프차에 대한 자동차 세금은
이때 결정된후 지금까지도 싼 세금으로 유지되고 있다.

대개 지프차는 배기량이 2천 가 넘는다. 3천 짜리도 있다. 일반승용차로
세금을 계산하면 2천 로 잡더라도( 당 2백20원) 연간 44만원이 되지만
지프차는 차가 크든 작든 10만원이다. 약 4분의1로 무척 싸다는 것을 알수
있다. 지프차의 세금이 이처럼 싸니 배기량은 커져만 가고 또 그것이
오늘날 지프차가 인기를 끌게된 한요인이 된것이 아닌가 한다.

신진지프(주)는 81년3월 거화(주)로 상호를 바꾸었고 84년10월에는 동아
자동차(주)와 합병,쌍용자동차(주)로 새출발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