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당시부터 실효성이 의문시되던 "장기산업채권"은 예상대로 실패작으로
끝났다. 정치논리(명분)에 밀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시행된 경제정책이
성공할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고 할수 있다.

지난달 2일부터 마감하루전인 지난달 29일까지 청약된 장기산업채권은
8백50억5천만원. 마감일의 실적을 합쳐 1천억원안팎에 그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실명전환의무기간동안 실명으로 전환된 가.차명예금
5조6천7백27억원(잠정집계)의 1.8%도 안되는 수준이다. 더욱이 재무부가
내부적으로 예상했던 5천억원에 비해서도 불과 20%에 머무는등 극히
부진했다. "차라리 도입하지 않았던게 나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장기산업채권이 실패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자금출처조사를
면제한다면서도 청약자를 국세청에 통보토록해 "과거노출"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키지 못한게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었다. 채권이 갖는 익명성이 없어
신분을 가리고 싶어하는 음성자금 소지자를 유혹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또 금리가 1%(2종)~3%(1종)로 낮게 책정돼 매입의 실익이 없었다는 것도
실패이유중의 하나다. 신분을 노출시키면서 "위험수당"도 작게 주어
경제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금융계에선 이런 이유보다 금융실명제 자체의 결함을 결정적인 실패사유로
지적한다. 실명노출을 겁내는 거액의 비실명예금이 대부분 "차명"으로
"실명"을 확인해 빠져나갈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밀보호를 이유로 계좌를
들추지 못하게 해놓아 굳이 "순진하게" 장기산업채권을 구입할 까닭이
없기때문에 당초부터 청약자가 많을 것으로 기대조차 않았다고 설명한다.

재무부도 사실 처음부터 장기산업채권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정치권이 중심이돼 실명제의 취지자체를 정면으로
뒤집는 "비실명"의 채권발행을 요구해 오니까 실효가 없을줄 뻔히 알면서도
정치권의 요구도 들어줄 겸,항간에 확산돼 있는 불안심리도 해소할 겸해서
임기응변으로 내놓은 대안이었다.

장기산업채권 허용을 발표하기 전날까지도 홍재형재무부장관이 "해봐야
실익이 없다"고 내놓고 반론을 편 대목이나 "9.24후속조치"에서
장기산업채권을 허용해준데 대해 추궁을 받은 자리에서 "두고 봐야 안다"
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던 것도 이같은 저간의 사정을 엿보게 한다.

결국 장기산업채권의 실패는 명분과 여론을 앞세운 정치논리에 밀려
"모양내기"식으로 추진되는 정책의 귀착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정책실패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홍찬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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