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두번이나 일으켜 왕위를 얻은 태종은 부왕인
태조의 노여움을 끝내 풀지 못한 회한과 방석 방간 두형제를 죽인 죄책감을
안고 재위 18년동안을 살얼음위를 걷듯 스스로를 경계하며 살았다.

그가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한재와 홍수등 천재지변이었고 이상스러우리
만큼 그가 재위하는 동안에는 천재지변이 잇달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럴
때마다 태종은 자신의 부덕을 뉘우치며 극진히 제를 올렸고 철선(음식을
들지않는 것)하며 금주했다.

등극한지 18년째 되는 1418년 한 해는 태종이 52세의 장년이었으면서도
충영대군에게 양위하지 않으면 안됐을 정도로 그 고통이 극에 달했다. 그해
2월 성영대군이 열네살의 어린나이로 죽자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왕의
체면도 아랑곳 하지 않은채 통곡했다.

"너는 일찍이 하루라도 나의 좌우를 떠난적이 없었다. 내가 수라를
들고자하면 네가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내가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자 하면
네가 반드시 수행하여 모든 기거에 있어 반드시 너와함께 하였는데 이제는
그만이니 무엇으로 마음을 잡겠느냐. 아아,말에는 다함이 있으나 정에는
끝이 없는데 너는 그것을 아는가,모르는가"

성녕대군을 사제하는 교서를 읽으며 태종은 왕답지 않게 흐느껴 울었다.
성녕을 잃은 태종은 마치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 같이 엄하게" 다루려했던
세자 양영대군이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방탕하여 속을 썩이자 같은해 6월
세자를 폐하여 광주로 보내면서 또한번 통곡했다.

"태종실록"에는 그이후로는 그가 벼락만쳐도 무서워 했고 오뉴월에 서리만
내려도 몹시 당황했다고 전한다. 설상가상으로 지병인 풍질마저 도져 그는
완전히 실의에 빠졌다.

바로 그무렵 태종에게 상소가 한장 날아 들었다. 정부의 간행물을
찍어내는 교서감의 미관말직인 정9품 교감 방문중의 상소였다. 정책적인
잘못을 책한 상소가 아니라 태종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상소였다. 태종의
충격은 그래서 더 컸다.

"원경왕후 민씨와 후궁 권씨를 나란하게 함은 신의 이해할수 없는 첫째
이고 궁중에 창기를 많이 불러들이는 것이 신의 이해할 수 없는 둘째요,
후궁을 총애하여 큰집을 많이 지어서 신전이라 칭함이 신의 이해할 수 없는
셋째입니다"

표현이 조금 과격하기는 했으나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방문중의 당돌함에 놀라며 태종은 상소를 조목조목 뜯어 읽어내려 갔다.

"천승문가에서도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일은 오히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나라의 임금이겠습니까. 본궁에 서리를 두어 어양의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서리로 하여금 관작을 아울러 받게함은 신의 이해할수 없는
넷째 입니다. 진우(화살의 깃으로 쓰던 독수리의 꼬리깃)의 값이 많은
것은 조가 20두에 이르며 천아(백조)의 값이 많은것은 조가 40두에 이르니
모두 백성에게서 박탈함은 신의 이해할수 없는 다섯째 입니다"

눈길이 "모두 백성에게서 박탈한다"는 부분에 이르자 태종은 정신이
번쩍들었다.

"나의 충신은 오로지 방문중 뿐이다. 만세후에 내가 어찌 죄를 벗어
나겠는가. 대언들은 이것을 보라"

태종은 이 상소를 대신들에게 공람시켰다. 그리고는 방문중을 친히
불러들여 물었다.

"이런 따위의 일은 내가 하지 않았는데 무슨 마음을 가지고 진술하였는가.
내가 만약 이런 일이 있다면 네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사필에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여 임금이 백성들에게서 박탈한다고 하였는가"

방문중의 대답은 의연하고 간략했다.

"신은 외방의 유생이므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백성들이 얻기
어려워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망령되게 임금의 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정의 대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바라옵건대 방문중은 그 죄가 죽어도 용납될수 없습니다. 모반율로
다스려 신민들의 감분을 푸소서"

대신들이 방문중을 난적 역적으로 몰아도 태종은 방문중을 죄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상소를 사서에 꼭 기록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방문중의 말이 나에게 부끄러운 점이 있어 내가 하늘에 살생하지
않겠다고 고하였다"고 버티면서 끝까지 방문중에게 죄를 주지 않으려 했던
태종의 의지도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위해 골몰했던 대신들의 등쌀에
끝내는 꺾이고 말았다. 결국 방문중은 장1백대를 맞고 처자와 함께 진양의
관노가 됐다.

그처럼 단호했던 태종의 결단도 그의 목숨만을 살리는 선에서 그치고 만
셈이다.

1418년 7월초 방문중의 상소로 큰 충격을 받은 태종은 한달뒤인 8월6일
세자인 충녕대군에게 옥쇄를 넘겨주고 훌훌 왕좌를 떠나 잠저로 향했다.
군신들이 통곡하며 어가뒤를 따랐다. 태종은 이런 상소도 받아들일수
있었던 왕이었기에 살아서 양위하는 더 큰 결단도 내릴수 있었나 보다.

<부국장대우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