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가 러시아문학의 황금기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학을 초월해 20세기 인본주의의 길을 열었으니 현대문학에 남긴 족적은
위대한 것이다.

이19세기 러시아문학이 창조한 전형적 인간형이라면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들수있다. 인생에 아무런 목적도 없고 그저 시대의 흐름과 기분
에 몸을 내던지는 일종의 무능력자,영원한 제3자,귀족 "오네긴"의 캐릭터는
러시아문학을 관통하고 있다.

19세기초 극작가 그리보예도프의 작품 "지혜의 슬픔"에 등장하는 차츠키도
마찬가지 인물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도 이
범주를 벗어날수 없다.

혁명이라는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 끝내는 스스로를 실종시키는 인간,
지바고인 것이다. 서방의 영화에서는 순수한 사랑을 주제로 치환시켜놓고
있지만 이는 원주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문학사에 특별한 인간형이 등장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 중국의 작가
노신의 "아큐"를 들수있다. 아큐 역시 어떤면에서는 러시아의 차츠키와
비슷한 캐릭터를 갖고있는 피동적 인물의 전형이다.

지난21일 옐친의 포고령으로 시작된 러시아 정치위기의 절정을 지나면서
이같은 문학사적인물에 대한 국외자들의 토론이 늘고있다. 러시아적
권력투쟁의 본질이라할까,시민들의 독특한 반응같은데서 러시아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 던져지는 셈이다.

지식인 그룹의 반응도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고르바초프,솔제니친,
야블린스키의 반응들은 관심을 끈다. 고르바초프는 옐친포고령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모호한 논평을 냈고 솔제니친은 공산복귀를 막기위한 조치라는
엇갈린 평가를 냈다. 더욱 주목거리인 것은 야블린스키의 반응이다.
신세대 경제학자며 대통령후보로까지 거론되는 그는 전형적인 냉소주의적
양비론을 펴고있다.

시민들로부터 반응을 얻어내기는 극히 어렵다. 익명이 보장된 여론조사
에서는 좋다싫다는 의견표명을 하지만 노출된 장소에서는 철저히 양비론
내지는 무관심론들이다. 지식인들조차 마찬가지다.

솔제니친을 제외하고는 징그러울 정도의 "제3자적"반응들이다. 오랜 기간
차르와 서기장들의 독재에 시달린 결과 형성된 캐릭터일수도 있다.
시민의식의 부족이라고 꼭집어 말하기도 힘든 그어떤 특성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체적 소수의 결정으로 역사는 달라지는 것이지만 볼셰비키혁명이나 91년
쿠데타 저지혁명도 소수가 이뤄낸 것은 마찬가지다.

러시아정치위기는 무관심과 냉소적태도의 거대한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 결론은 유보할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