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교실을 돌아가며 교육을 받는 소위 빙빙돌아가는 교육방법이
생겨나게 됐다. 천막을 반으로 쪼갠 교실이니 클수가 없었고 그래서
한반의 정원은 16명이었다. 16명이 동기생으로 1번교실에서 부터
1백번교실까지 함께 교육을 받았다. 정비사가 모자랄 때이니 4백명단위로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매일 16명이 입교하고 16명이 졸업하는
것이었다. 마치 포드 자동차의 흐름식 대량생산방법과 같았다.

항시 1백개 반에서 교육하고 있으니 총교육정원은 1천6백명이나 된다.

반면 교관요원은 10여명밖에 되지않아 우선 교관들은 1번부터 10번까지의
교실에서 강의를 했다. 강의가 끝나면 그날 배운것에 대해 시험을 치렀고
그중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한명을 그 교실의 조교로 임명했다. 그리고는
그 조교에 대해 보충교육을 시킨후 그 교실에서 강의를 시켰다. 이 조교는
하루분의 교관인 셈으로 똑같은 것을 매일 반복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1번에서 10번까지의 교육을 조교에게 담당시키고 난후 교관요원들은 11번
에서 20번까지의 교실에서 강의를 했다. 이때도 학생중에서 조교를 선정한
후 교육을 담당시키고 교관요원들은 21번에서 30번 교실로 갔다. 결국 교관
한명에 10명의 조교를 거느리게 된 것이다. 교실수도 물론 10개가 된다.
아마도 이런 교육방식은 전무후무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치열할
때이고 공군의 비행기 정비수요가 하루가 다르게 커질 때이니 취해진
비상조치였다.

이 교육대가 후일의 공군기술학교의 모체가 된다.

어쨌든 교육방법의 성과는 의외로 좋았다. 우선 학생들의 질이 좋았다.
전쟁때라 군대에는 가야했는데 기왕이면 공군기술하사관이 되겠다는 욕구가
컸다. 고등학교 졸업때 성적도 좋은 학생들이었다. 신병훈련도 막 끝낸
싱싱한 정신상태였다. 교관들도 열심히 했다. 한예로 "무장교실"에서는
비행기에 장착하는 무기는 모두 실물을 가지고 왔다. 기관포 로켓발사장치
건사이트(조준기) 폭약을 뺀 각종 포탄등이다.

"계기(계기)교실"에는 비행기에 장착하는 수많은 계기를 모아 가지고
왔다. 분해해서 내부설명도 하게 하고 동작하는 상태도 알수 있게 했다.
실물교육을 했다. 교과서로는 미공군 수리교본을 번역해서 사용했다.
따지고 보면 이 이상의 교육방법은 없었다. 전쟁때라 교육기간이 4개월
정도의 단기간으로 기초교육을 끝냈지만 현장에 가서 비행기를
수리하다보면 숙련공이 되겠지 하고 자위했다. 다행히 천막교실 출신
하사관들은 졸업후 제몫을 단단히 한것으로 평가받았다.

시발자동차회사의 공장장이 되고 난후 나는 이런 옛일을 돌아보며 같은
방식으로 자동차 보디를 만들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시발자동차를 완전
분해시켜 보니까 약30개 뭉치가 되었다. 그리고 판금공(철판을 가공하는
기사로 용접도 해야한다)중 가장 우수한 30명을 골라서 반장으로 지명했다.
"각 반장은 이중 한가지만을 만들어라. 조수가 필요하면 각 반장이
구하라. 하루 한대분씩 만드는 것이다. 노임은 부품마다 가격이 정해져
있다. 개수로 노임을 지급하겠다. 빨리 만들면 인원수를 줄여도 좋다.
빨리 퇴근해도 좋다. 검사는 검사원이 한다"고 지시했다. 그 효과는 바로
다음날부터 나타났다. 각 반장들은 어디서 데리고왔는지 조회때 보니
종업원이 1백50명 이상이나 됐다. 이들은 손쉽게 빨리 만드는 각종 기구를
만들기 시작하더니 며칠후에는 자동차가 하루 1대씩 제작되는것이 아닌가.

제작비는 과거 숙련 보디공들이 만드는 값의 3분의1도 안되었다.
얼마후에는 인원만 좀 보충하면 하루 몇대씩도 만들수 있게 됐다.

즉 작업원은 한가지 물건만 만들도록 하고 성과급,즉 성과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는 제도를 쓴 것이다. 연구도 하게되고 필요한 기구도 만들어냈다.
기술도 익숙해져서 생산성이 3배로 좋아진 것이다. 물론 사장도 아주
기뻐했다. 시발택시는 당시 재산가치가 컸다. 한두대면 생활걱정이
없었던 시절이다.

한가지 문제점은 "5.8라인"조치로 정부에서 못 만들게 하는 것뿐이었다.
56년말 우리나라 자동차 총수는 2만5천3백28대,57년말 2만8천86대,58년에는
2만8천9백33대로 2년간 겨우 3천6백대가 늘어났다. 그러니 시발자동차회사
는 하루 한대정도 만드는 일감밖에 없었다. 자동차산업이 보호 육성되기는
커녕 규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휘발유 안쓰는 자동차를 만들라고 야단이었다.
휘발유를 안쓰는 차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증차를 시켜준다고도 했다.
국제조류에 맞지 않는 행정조치였는데 그러나 사장은 증차욕심에 휘발유
안쓰는 자동차 연구를 하라는 것이다. 나는 할수없이 과거 일정때
휘발유가 없어서 쓰던 목탄차를 다시 끄집어 냈다. 무연탄을 목탄같이
만들어 휘발유 대신 연료로 써 차를 움직이게 할 생각에서다. 무연탄은 잘
연소하지 않으니 완전히 가루로 빻아서 이것을 다시 목탄형태로 만들었다.
미세한 구멍이 무수히 있게되니"스펀지 탄"이라고 했다. (현재 야외에서
쓰기위해 시판되는 인조목탄을 생각하면 된다. 특허를 냈는데 당시는
수요가 없어 팔 수가 없었다. 지금 인조목탄의 수요가 많은것을 생각하면
돈을 버는 사람은 운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된다)

스펀지 탄을 사용한 시발차는 휘발유보다는 성능이 나빴지만 자동차는 잘
굴러갔다. 교통부장관과 상공부장관이 시승을 했다. 나는 그 공로로
김일환 상공부장관상을 탔다. 상공부에서 현상금을 걸고 휘발유 안쓰는
차와 연료에 대한 발명품모집을 했는데 실제로 움직인 차는 나의 엉터리
스펀지탄차와 연료(스펀지탄)뿐이었기 때문이다. 두가지 상을 모두 혼자서
차지했지만 솔직히 이런 차를 가지고 상을 타다니 씁쓸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시발자동차회사는 스펀지탄차의 개발로 약간의 황색딱지를 추가로
받았다. 사장은 그 보답으로 나에게 시발차를 한대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초창기를 증언할 사람이 없어지기
전에 몇마디 더 남겨 놓아야겠다.

시발차에 사용한 엔진의 모델은 미군 지프이지만 완전히 국산화했다.
내가 직접 제조했다. "엔진 블록"제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주물공업이 발달되지 않았을때이지만 실린더 헤드까지는 만들수 있었다.
10개정도 만들어야 한두개 쓸만했다.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생하다
선박용 엔진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동차 실린더 블록에
슬리브(sleeve)를 처음부터 끼워넣는 법은 없다. 선박엔진에서만
사용된다. 생각끝에 실린더 블록을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피스톤이
들어가는 곳, 즉 피스톤 벽을 없애버리고 주물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난후 슬리브라는 것을 따로 만들어 나중에 끼워넣는 식인 것이다. 이
슬리브내에서 피스톤이 상하로 왔다갔다 하며 엔진이 움직이게 된다. 이
슬리브에는 수명을 길게 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크롬 도금까지 했다.
피스톤은 서울피스턴(대표 방응준)에서,피스톤 링은 유성기업,스프링은
대한철강(대표 허주열),하부휠은 하동환제작소(대표 하동환)등에서 구입해
썼다.

엔진제작에서 가장 큰 난제는 크랭크샤프트와 기화기(카뷰레터)등
두가지였다. 처음에는 미군용품을 썼으나 나중에 크랭크샤프트는
특수주물로 만들어서 해결했다. 군용 지프이기 때문에 안전율이 높아
특수주물로 만들어도 민수용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기화기였는데 이것만은 해결 못했다. 미션과 차축도 개발하지 못해
중고품을 구입해 썼다. 후에 중고품 조립이라는 악평을 받은 때문이다.
고장도 주로 이런 중고품에서 발생했다. 이런 부품은 선진국에서도 전문
메이커가 만들어서 납품하는 물건들이다. 여하간 엔진만큼은
국산품이라고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었다. 부산에 있던 신진공업사는
시발자동차회사의 엔진을 사다가 신진자동차를 만들어서 시판을 했다.

차체는 수공업적으로 제작했다. 수요가 적으니 기계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연간 3백~4백대의 생산규모로 기계설치를 할수있는 양이 못됐다.
그러고도 값은 싸야 시장성이 있으므로 가장 만들기 쉬운 모델, 즉
상자모양의 차형을 제작할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시발형 자동차다.
재료로는 철판을 수입할수 없을 때라 드럼통을 잘라서 편 철판을 썼다.

자동차 외피(외피)재료로서는 좀 두터워 시발차 무게는 1천5백kg이나 됐다.
지금 나오는 프라이드차가 7백50kg 인 것에 비하면 배나 무겁다. 볼품은
없어도 차체는 아주 튼튼해 전복사고가 나도 차체는 멀쩡했다. 수리비도
적게 들었다. 철판이 두꺼우니 용접하기가 쉬웠던 것이다. 차주들은 얇은
철판을 쓰는 외국차보다 경제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평했다.

지프형만 만든 것은 아니다. 6기통 엔진의 대형승용차와 픽업트럭
마이크로 버스도 제작, 선보였다.

그러나 교통부는 한사코 허가를 해주지를 않았다. 지프형으로 통일하라는
것이었다. 지프형 외에 판매한 것은 우체국에서 쓰는 소포나 현금수송용
미니 마이크로 버스를 몇대 판것이 고작이다.

국내수요도 있고 자동차 값도 비싸지 않은 편이어서 자동차제조 허가만
해주면 자동차공장을 확장할수 있고 또 자동차공업이 발전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정부는 자동차를 못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참 한심하고 졸렬한
정책이었다. 이때 브라질의 한 회사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한국에서
나오는 시발자동차 소식을 신문에서 보았다. 축하한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나라가 15개국이었는데 한국이 16번째이다. 우리 회사에서도
시발자동차를 제조하고 싶은데 기술협력이 되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러던 차에 4.19를 맞았다. 곧 장면정권이 들어서면서 자동차공업정책은
완전히 방향을 잃었다. 교통부는 그나마 이따금 발행하던 황색딱지
(증차허가증)발행을 중지했다.

시발자동차회사는 일감이 없어져 버려 직원의 봉급지급을 중단할 수
밖에 없게됐다.

공장직원들의 생계,그것도 하루살이 신세해결을 위해 다방면으로 애썼으나
내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런상태가 오래가면 갈수록 상하간의 신뢰성과
명령계통은 깨지고 아무리 좋던 인간관계도 적의로 변해 버리게 마련이다.
분위기는 살벌해지고 폭동전야 같은 난폭한 언행이 오가게 된다. 인간이란
배가 고파지면 체면도 없고 신의도 없어진다. 나는 만30세가 막 되었을때
이 경험을 했다.

그때 고용주가 일을 시키고 그 대가를 주지않는 것은 큰 죄악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또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큰 쇼크를 받았다.
시발자동차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몇달분치의 봉급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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