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의 생기 발랄한 젊은 여성이 실크 블라우스에 군복바지를 입은채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영국이 인도에 대한 식민지정책을 본격화하면서
각지방의 소왕국들을 차례로 병합해가자 대영군사행동이 인도전역에서
일어났다.

인도의 수도 델리의 남동쪽에 위치한 쟌지왕국의 젊은왕이 죽자 영국은
강제로 이 소왕국을 삼켜버렸다(1853). 나라를 빼앗긴 젊고 아름다운
락슈마바이왕비는 단검을 빼들고 백마상에서 대영 전투를 지휘했다.
진압에 나선 영국의 군대는 이 여장군의 독전에 고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부대는 결국 영제국의 힘에 밀리기 시작했고 그녀자신도 1858년
6월 전투중에 장렬한 전사를 했다. "인도전국의 반란군중에서 그녀는 가장
뛰어난 지휘자였으며 용감한 전사였다"고 당시 영국군을 지휘한 한장군이
회상했다.

젊은 왕비의 대영투쟁사는 지금도 인도인들의 가슴깊이 새겨져있으며
일반 민중들은 옛날 이야기와 민요의 주인공으로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곤
한다.

인도의 전통적인 지배계급과 중산층은 끈질기게 영국군에 저항, 한때는
전국의 3분의2 이상이 저항군의 지배하에 장악되기도 했다. 영국의
무력탄압도 이에 못지않게 더욱 잔인해져갔다. 영국의 타임스지가
"기독교의 교회가 1동 파괴되면 힌두교의 사원100개를 불사르고 백인
1인이 살해되면 1000명의 폭도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독려"한 것도
이무렵의 일이다.

인도전역을 "평정"한 영국은 그이후 인도가 독립할때까지(1947)
인류사상 가장 혹독한 식민지 정책을 펴온 것으로 알려져왔다. 철저한
분열통치에 의한 민족정신의 말살이 그 동서을 이루었다. 축지역간의
분열, 종교에 의한 분열, 사회계급간의 분열심화가 분열통치를 선도했다.
영국의 식민지시대에 부설한 인도의 철도레일이 지금도 같은 선에서
광궤 정상궤 협궤(1. 67 ,1 ,0. 76 )로 연결되어 사람과 화물이 타고
내리기를 거듭하도록 해놓았다. 산업발전의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분할통치가 남긴 상징인 셈이다.

라오 인도총리가 국가영수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비록
공백기간이 길긴했지만 "아픔"을 같이한 옛이웃을 맞는 기분이다.
따뜻하게 맞아 포근한 기분으로 대접해 보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