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부터 64년까지 3년동안 경제기획원장관이 8명이나 바뀌었다.

61년 7월에 김유택씨가 초대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그후
7개월만에 송요찬 내각수반이 기획원원장을 겸임한후 김현철씨 김유택씨
유창순씨 원용석씨, 그리고 다시 김유택씨가 부임하였는데 이때 처음으로
부총리를 겸하게되었다.

김유택씨는 2년반동안 경제기획원장관을 세번이나 지냈으나 한번의 임기가
길어야 7개월이 좀 넘는 정도였다.

김유택씨가 물러난 다음 64년5월 장기영씨가 부총리겸경제기획원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임기는 3년5개월로 비교적 장수 부총리였다. 그후
70년대말까지는 기획원장관이 빈번한 교체없이 비교적 오랜기간 재임하면서
안정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80년대초부터 90년대초에 이르는 동안
빈번한 각료교체로 정책의 많은 혼란과 사회적 불안정이 있었음을 우리는
경험하였다.

박정희대통령이 초기 혼란기에는 각료를 자주 바꾸다가 후에 안정적으로
내각을 이끌어 가게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대통령은 64년
12월 우리나라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하였다. 공업화추진에
필요한 차관자금을 확보하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의 경제부흥에
관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때 서독의 에르하르트총리는
2차세계대전후 경제총리로서 패전후 서독경제를 부흥시키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박대통령에게 장관을 자주 바꾸면
정책의 일관성이 없어지고 국정의 안정을 이룩할수 없으니 자주 교체하지
말도록 충고했다고 한다.

그후부터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박대통령은 장관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꿔야할 이유가 생겼는데도 그냥두어 사태를 악화시키는 일은
없었다. 바꾸어야 할 이유가 생겼을때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과감히
적시에 교체하는 기민성도 있었다. 이런것들이 60~70년대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러가지 변혁속에서도 경제개발계획은 활발히 추진되었다. 1차계획은
농업과 사회간접자본건설에 어느정도 중점을 두면서 정유 철강 비료 시멘트
화력발전소의 건설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62년2월에는 대통령참석하에
울산공업단지기공식이 현지에서 거행되었다.

울산공업단지의 착공은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웅장한 시작이었다.
현대적인 정유산업과 석유화학공업,그리고 비료공업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자동차공장 조선소를 비롯한 여러공장들이 건설되어 울산은
오늘날 거대한 공업도시로 성장하였으며 우리나라공업의 심장부가 되었다.
그후 울산공업단지의 경험을 살려 규모나 내용은 다르지만 많은 공업단지가
여러곳에 건설되었다.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공장을 건설하는데에는 자금 기술등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중 전기 도로 항만 공업용수등의 부족이 심했다. 특히
전력부족이 심각하여 가정용뿐만 아니라 공장에 대한 전기공급도 제한하는
전반적인 제한송전을 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그동안 전력부문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늘려왔다. 그러나
70년대말까지도 제한송전이 계속되었으며 80년대 중반에 일시공급과잉인때가
있었으나 89년에서 92년까지의 3년동안 다시 전력공급이 부족하여 부분적인
제한송전이 있었다.

내가 90년3월에 동력자원부장관으로 부임하여 보니 유류의 과다소비와
전력부족이 큰 문제였다. 그래서 에너지소비절약 운동을 전개하면서
전기사용을 제한하는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전기등 에너지사용을
제한하는 조치는 국민에게 매우 인기없는 일이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정책이란 반드시 국민에게 인기있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닌것 같다.
대부분의 국민은 당장 편하고 쉬운것을 원하지만 국가운용은 당장 국민이
불편해 하더라도 또 인기가 없더라도, 장기적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