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이윤희씨(45)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뒤 73년 도불, 파리 소르본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 동아미술제에서 동아미술상을 받았고 88년부터
서울대 미대에 출강중이다. 78년 첫개인전을 열었고 그간 국내외에서
네차례의 작품전을 가졌다.

만만찮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씨는 마냥 조용하고 수줍다. 간간이 모은
조선조목기로 꾸민 넓지 않은 집에서 혼자 수묵의 세계에 몰두한다.
화단의 유행이나 바깥세상의 크고작은 소리는 이씨의 삶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보인다.

9월3~15일 서울강남구논현동 예맥화랑(549-8952)에서 갖는 다섯번째
개인전을 수묵담채화만으로 마련하는 것은 말없는 가운데 전통한국화의
맥을 지켜가려는 이씨의 속마음을 전한다.

11년만에 여는 서울전인 이번 전시회에 이씨가 내놓을 작품은 "경복궁의
꽃담" "화엄사에서" "쌍봉사에서" "하회마을의 고택에서" "파리의 노틀담"
"사르트르의 오후" "톨레도의 문"등 50여점. "동서양 유적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한국과 프랑스의 옛건축물을 그려낸 작품들이다.

"수묵의 폭과 가변성을 드러내보고 싶었습니다. 먹도 검정먹과 청먹을
함께 썼지요. 번졌을 때 두 가지가 은근히 큰 차이를 보이면서 각기
독특한 맛을 냅니다. 남들이야 어떻든 제 경우는 수묵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습니다. 두 곳의 건축물을 제재로 택한 것은 건물이야말로 당대문화의
특징과 사람살이의 흔적을 가장 잘 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화면속에서 옛건물의 웅장한 모습이나 높다란 탑의 위용등은 간 곳이
없다. 남아있는 것은 금방이라도 안개속에 사라져버릴 것같은 희미한
그림자뿐. 낡은 기와지붕과 실루엣만 남아있는 거대한 탑과 일부만 보이는
아름다운 꽃담은 흘러간 시절 영화롭던 삶의 흔적을 보여준다. 먹의
번짐과 스밈이 세월의 흐름속에 낡은 것으로 변해가는 모든 것의 모습을
자연스레 나타내고 있는 것.

"대상의 확장이나 매재의 다양화도 중요하겠지만 아직까지는 수묵의
깊이에 대한 실험이 더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아주 작은 차이에도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는 먹의 세계에 좀더 깊숙이 빠져볼 생각입니다"

이씨는 올들어 예술의전당전관개관기념전 오늘의 한국회화전(아르헨티나)
등에 참가했고 94년6월 일본은좌송도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질 예정이다.

<박성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