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앞수표로 계산하실때는 반드시 주민등록증을 함께 보여주기
바랍니다". 서울 명동지역상가에 지난13일부터 나붙은 새로운 안내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어떤상가는 아예 "자기앞수표는 사절합니다"라는 문구를
공공연히 내걸고있다. 실명제실시이후 자기앞수표 받기를 꺼리는 것이다.

그동안 고액권지폐처럼 사용돼왔던 자기앞수표가 실명제실시로 존폐의
기로에 서있다. 일부에서는 이기회에 아예 자기앞수표제도를 없애고
개인당좌수표제도를 활성화하거나 고액권지폐를 새로 만들어야한다는
주장도 내놓고있다.

금융실명제는 자기앞수표를 발행하거나 지급받을때 일일이 실명확인절차를
거치도록 규정해놓고 있다. 이에따라 검은돈의 세탁수단으로 자기앞수표를
이용해왔던 사람들은 물론 일반상인들조차 자기앞수표사용을 꺼리고있는
상태이다.

실제 실명제실시이후 자기앞수표는 발행액수는 물론 교환실적도 크게
줄었다. 실명제실시 전날인 12일 하룻동안 서울지역에서만 1백26만2천장
(2조7천3백90억원)이 교환됐던 자기앞수표는 지난16일 61만2천장(1조5천
7백70억원)으로 51.5%(금액으론 42.4%)나 감소했다. 발행잔액도 연일 감소
를 보이고있다. 조흥은행의 경우 지난12일 8천여억원에 달하던 자기앞수표
발행잔액은 16일 7천여억원으로 1천억원이나 줄었다. 창구에서는 1백만~
2백만원을 인출하면서도 자기앞수표대신 현찰을 요구,은행들은 현찰마련에
비상이 걸려있는 상태다.

이런 자기앞수표감소상태는 계속돼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유명무실해지리라는게 은행관계자들의 전망이다. 우선 돈세탁의
수단으로서 애용가치가 상실됐다. 지금까지 자기앞수표는 가명이나
무기명으로 발행하거나 지급받을수 있어 돈세탁을 위해서는 그만이었다.
예컨대 10억원의 돈을 뇌물로 받아 자기앞수표로 나눠 출금,몇번의
가명계좌를 통해 입출금과정을 거치면 돈의 꼬리가 "완벽하게"잘려졌다.
"날고긴다"는 은행감독원검사팀도 몇달을 거쳐 돈추적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것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실명제실시로 가명배서가
불가능해져버려 돈세탁도 물건너가버린 셈이다.

현찰거래가 빈번한 중소상인들도 자기앞수표사용을 꺼리기는 마찬가지다.
"매출액줄이기가"가 공공연한 상황에서 돈흐름의 흔적이 훤히 드러나는
수표보다는 현찰을 더 선호할것은 뻔한 일이다.

자기앞수표는 지금까지 "막강한"사회적위상에도 불구하고 폐지돼야
마땅한걸로 지적돼왔다. 우선 발행이나 보관비용이 너무 비싸다.
은행들은 장당평균 4백79원을 들여 자기앞수표를 발행하고있다. 이렇게
비싸게 발행된 수표는 10만원짜리인 경우 평균수명이 길어야 6일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돈을 하도 험하게 써 평균수명이 일본보다 1년정도 짧다는
1만원권지폐도 폐기될때까지 3년반이나 살아서 움직인다. 은행들은
하루평균 20만장씩 돌아오는 수표를 10년간 창고에 보관해야한다.
20만장이면 한은이 조폐공사에서 찍은 1만원권신권 3억원을 넣어 운반하는
약30 짜리 마대로 7개에 달한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이유보다는 신용사회구현의 걸림돌이 된다는게
수표폐기의 보다 근본적 이유였다. 자기앞수표는 말그대로 발행인인
은행을 지급자로 하는 수표이다. 은행이 보증을 책임지는 수표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일본에 자기앞수표제도가 있지만 개인신용으로
도저히 수표발행이 불가능한 사람만이 수수료를 내고 이용하는데 그치고
있을뿐이다. 미국같은 나라는 전부 개인신용에 의한 개인수표로 결제가
이뤄지고 있다. 관계자들은 제3자인 은행이 지급을 책임져주는
자기앞수표가 있는한 신용사회구현은 요원하다고 말한다.

관계자들은 따라서 자기앞수표대신 개인당좌수표(가계수표)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물론 개인당좌수표제도가 없는것은 아니다.
지난81년 신용카드와 함께 도입된 가계수표는 85년1백만명을 넘어선후 전혀
늘고있지않다. 일부에서는 자기앞수표가 효용가치를 잃어가는대신 5만원권
10만원권등 고액권지폐발행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그러나
한은은 인플레이션 우려를 들어 여기에 단호히 반대하고있다.

보람은행이 시행중인 "은행보증가계수표"가 과도기적이나마
자기앞수표구실을 할것으로 보는 사람도있다. 이는 예금을 담보로 은행이
지급을 보증하는 가계수표이다. 보람은행은 앞으로 예금담보없이
신용으로만 은행보증가계수표를 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제도가
자리잡히면 은행의 보증없이도 개인당좌수표사용이 정착될것으로
보람은행은 내다보고있다. 이밖에 외환 대구은행등도 실명제실시를 계기로
은행보증 자기앞수표발행을 검토중이다.

결국 실명제실시로 자기앞수표이용은 급격히 줄어들것으로 예측된다.
그대신 은행보증 가계수표라는 과도기를 거쳐 개인신용에 의한
가계당좌수표가 활성화될수 밖에 없을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신용사회구현정도와 궤를 같이할것임에 틀림없다.

<하영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