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정녕 밤에 이루어지는 것인가. 정부는 12일저녁 7시 긴급 소집된
국무회의를 통해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단행했다. 그 결과 지난 82년말
제정된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한채 그 역할을
헌법상의 대통령긴급명령으로 넘기는 운명을 맞았다.

아무튼 주사위는 던져졌다.
1993년8월12일 밤8시는 한국경제와 금융사상 지울수 없는 역사적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역대정권이 10년여를 두고 씨름해왔던 금융실명제는 변화와
개혁,신한국과 신경제건설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 문민정부에 의해 출범
6개월이 안된 순간에 예고없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단행되었다.

굳이 대통령긴급명령을 빌려야 했느냐가 논란이 될수는 있다. 헌법
제76조는 긴급명령 발동요건으로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가 있어야 하고
그런 경우에도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경제상의 처분 또는 명령을 할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일반 법절차에 의해 실시할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과 문제점을
말한다. 그래도 꼭 이런 비상적인 쇼크요법에 의해야 했는지는 오는 16일
소집될 임시국회가 짚어봐야할 몫이다.

만에 하나 국회가 추인을 거부하면 긴급명령은 그 순간 효력을 상실하고
금융실명제는 백지화된다. 그러나 그런 사태는 예상되지 않는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해야 한다는데는 진작부터 폭넓은 공감대가 있어왔기
때문이다. 국회가 그런 국민적 컨센서스를 거스르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조치가 장차 실물경제와 금융자본시장,그리고
또 나아가서는 정치와 사회및 국민생활전반에 초래할 영향과 부작용을
극복하는 일이다.

엄청난 충격과 혼란이 우려된다. 그로 인한 부작용은 지금 예상을 초월할
것이다. 하루아침에 사채를 전면 동결해 버린 72년의 8.3조치,그리고 또
최근인 90년의 5.8부동산조치와 같은 긴급조치의 충격적인 파장을 우리는
익히 경험한바 있다. 이번 조치는 그 이상이다. 어찌보면 통화개혁을
능가하는 혁명적 조치이다.

지난날의 8.3조치와 5.8조치는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이번
조치 역시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치밀한 집행과 인내와 보완이
요구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이 조치와 더불어 파생될
무수한 부작용을 예방하고 극복하는 일이다.

정부도 여러모로 대책을 제시하고는 있다. 부동산투기와 자금의
해외유출을 경계해서 이순간 이후의 모든 부동산거래에 대한
자금출처조사와 3,000달러이상 송금자명단 보고의무등을 말하고
있고,중소기업의 자금난 우려에 대비한 특별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할 것이다. 현재 예금의 99%,주식거래의 97%가
실명화되어 있다고 하나 만약 3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비실명자금이
이탈해서 이동할 경우의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 2개월의 경과기간내에
모두 실명화된다면 모르지만 그것이 지하로 이동할 경우 부동산과
실물경제,공.사금융시장을 크게 교란하고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 또
"차명"예금과 계좌의 경우는 어쩔 도리가 없다.

충격과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가급적 최단기간내에 흡수하고 극복할 대책과
노력이 절실하다. 그래야만 실명제를 소기한대로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고
궁극적으로 한국경제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수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금융거래에 대한 철저한 비밀보장이다. 정부도
여러가지 방안을 약속은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실명화자체와 관련해서
여러갈래의 비밀침해위험을 함축하고 있어 앞으로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비밀보장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다른 모든 조치에 앞서 분명하고 믿을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확고하게 마련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실명제
조기정착의 또다른 전제인 동시에 서둘러야할 과제이다.

전격적이지만 정부로서는 이미 준비하고 예정했던 조치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공직자재산등록 종료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한편 실명제를
결행하면서 단계적 실시방법을 취한 것은 상당히 숙고한 결과로 보이며
그것은 일단 옳은 선택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를 96년부터로 미루고 주식양도차익에 대한 과세를
김대통령임기이후로 멀찌감치 미룬 것은 설령 충격과 혼란은 있겠지만
실명제의 성공확률을 그만큼 높여준다고 말할수 있다.

다만 정부는 개혁과 경제회생이라는 두개의 상충되지만 양립가능하다고
고집해온 목표가운데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선개혁을 선택했음이
분명해졌다. 경제활성화는 현안의 투자심리회복을 비롯해서 당분간
뒷전으로 밀려날수 밖에 없어졌다. 우선 실명제쇼크를 흡수해야겠고
다음은 한발더 멀어진 정부의 예측가능한 정책에 대한 기대와 정책신뢰가
복원되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