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구미전자공단 이야기를 해보자. 구미공단하면 현재는
직감적으로 전자공업을 연상할만큼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메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구미전자공단은 처음부터 전자공업을 생각해서
만들어진 공단이 아니었다.

69년 봄,아직 보리가 새파랄 때다. 박정희대통령은 경상북도 시찰길에
나섰다. 도청도 들러보고 한국나이론공장에도 갔다. 이때
김정류상공장관이 수행하게 되었는데 나(당시 상공부기획관리실장)도
장관지시로 따라가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대구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구미에
가보자고 했다. 김장관과 나는 구미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좀 의아하게 느끼면서 따라나설수밖에 없었다. "박대통령이
고향에 가시는가 보다"정도로 생각했다.
당시 구미는 작은 농촌마을이었다. 구미읍에 거의 다 왔을때 선도차가
낙동강쪽으로 우회전했다. 비포장 도로였다. 얼마쯤 가니 공장같은
건물이 막 공사중이었다. 일행은 이공장 앞에서 섰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전날 비가 많이 내렸는지 땅은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부랴부랴
가마니를 깔았는데도 붉은 흙탕속에 발목까지 빠졌다.

모두 공장사무소에 안내됐다. 거기에는 곽태석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곽태석사장은 21년에 태어나서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그곳의 광양정밀(주)사장을 역임한뒤 66년
재일 실업인으로서 구로동 한국수출산업공단에 제1호 입주업체인
전자부품(축수석)생산공장인 싸니전기(주)를 창업한데 이어 구미에 공장을
건설중 이었다. 두개 공장을 건설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일본도시바와
합작으로 짓고 있는 전자부품(트랜지스터)공장이고 또 하나는 한국전자
라는 TV공장이었다.

곽사장은 박대통령과 동향인 선산출신으로 박대통령보다 네살 적은
후배가 된다.

그런 그가 타향에서 돈을 벌어다 고향에 공장을 짓는 것이어서 미담
거리가 됐다.

---양탁식지사도 적극지원---

당시 우리나라 농촌에는 일자리가 없었다. 때문에 박대통령이
감격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고도 남는다. 더욱이 가난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준다는 것이고 그것도 후배가 발벗고 나섰으니 지나는 길에
구미까지 오게 된것이다.

곽사장의 현지사정을 듣다보니 많은 고생을 하고 있구나 하고 동정이
갔다. 첫번째가 전화문제였다. 일본회사와의 합작회사이기 때문에
일본과의 국제전화를 자주 해야 되는데 그것이 쉽지않았다.

전화 한통화 하려면 구미에서는 국제전화가 통하지 않으니 왜관에 있는
우체국까지 나가야하고 그것도 금방 연결되는 것이 아니어서 하루종일
걸릴때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당시는 국제전화선이 모자라서 시골에서 전화하려면 두세시간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큰 도시의 우체국에서만 가능했다)
두번째로는 공장을 짓고 있는 지대가 어떻게 된 것인지 비만 오면
진흙밭이 되어 장화를 신어야 할 판이고 자동차 타이어가 빠져 버려 건설에
지장이 많다는 것이었다.

전기문제 수도문제도 있었다. 황무지 벌판에 공장만 짓고 있으니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일본에서 온 기술자의
숙박,음식,사기문제등도 있다고 했다.

곽사장이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 박대통령을 여기까지 모신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지원문제는 1차적으로 지방장관의 소관사항들이다. 당시
구미가 속한 경상북도의 도지사는 양탁식씨였는데 그는 즉각 곽사장이
짓고있는 공장에 접하는 남쪽 땅 70만평에다 지방공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설명하였다.

아마도 곽사장이 양지사를 도청으로 찾아가서 여러 이야기를 하였고
지원도 부탁했으니 이럴경우를 생각해 공단조성 절차를 받고 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69년1월16일 건설부 허가). 양지사와 곽사장이 사전에 짜고한
일인지도 모른다. 양지사는 기술자 출신으로 공무원으로서 가장 출세를 한
사람중의 하나이다. 나와같은 서울대 공대 화공과출신으로 도자기를
전공했다. 나보다 1년선배이다. 상공부 화학과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상공부를 퇴직하고 난후는 공무원을 하면서 기술직으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경상남도 부지사를 지내고 내무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경북도지사가
되었다(나중에 서울시장). 인품이 좋은데다가 정치감각이 있으니 박대통령
고향인 구미에다 공단을 조성하겠다는 안이 나올수도 있었다고 보인다.
양지사의 회고를 들어보자. (구미공단 10년사에서 발췌)
"68년에 나는 경북도정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농공병진된 "웅도경북"구현을
위하여서는 먼저 공업거점구축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경북은 대구지방의 방직공장외에는 공업분야에선 낙후된 상태였으나
그 후 포항제철이 건설되면서 자신을 얻어 경북공업화의 터전을 이룩하고자
내륙단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마침내 구미지역이 적지였다. 그곳은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수림이나
농토가 없는 값싼 박토 야산 구릉지였으며 풍부한 공업용수(낙동강)를
무진장으로 공급할수 있고 또한 인근10여개 시.도의 노동력도 흡수할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이었다.

이렇게 하여 설립된 공단에 내키지 않는 발을 내디딘 초기의 몇몇
기업들은 불비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감수하여 오늘의 찬란한 "공업입국"의
기수로 성장하게 되었고 구미공단발전의 핵이 된 것이다"
어쨌든 양지사는 박대통령을 수행,구미를 시찰한 자리에서 지방장관
책임하에 공단을 조성하여 대구시내에 있는 공장들을 이전시키고 경북에
신설하고자 하는 공장들을 이곳에 적극 유치토록 하겠다고 보고했다.
유치업종으로는 폴리에스테르 화학섬유,방직,전자,전기기기,고무,제지,
금속가공,경기계,농산물가공,농화학,도자기공업,그리고 이와 관련된
공업등을 예시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공장이라도 입주시키겠다는 안이었다. 특히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짓겠다고 한 것은 한국나이론이 공장부지만 조성해
주면 입주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보고에 박대통령은 입주업체에 불편이 없도록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상경하였다. 이후 나는 구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다만 공해 공장들이 들어와서 말썽이나 부리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대지조성비 평당3천원--

그러던차 71년초 김정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차관보,경상북도에서
양지사가 구미공단을 만든다고 해놓고 일추진이 잘 안되니 구미 지방에서
진정서가 날아 와요. 각하께서도 걱정이 되어 어떻게 해보라는 지시가
있는데 좋은안이 없소"하고 물어왔다. 나는 "알았습니다. 1백만평이나
되는 공단을 지방장관 혼자서 조성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곧 안을
짜서 보고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여러차례의 외국시찰을 통해 공해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을
때였다.

런던의 템즈강 독일의 라인강 일본 동경의 스미다강이 모두 간장물 같이
갈색기를 띠는 것을 보았다. 각 나라마다 이런 강물을 정화하는데
필사적이었다.

까닭에 낙동강 상류인 구미에다 배수가 많은 공장을 건설하면 문제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공장배수가 제일 적은 산업이 어떤것이냐를 따져보니
전자공장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곧 정밀기기센터(FIC)의
박승엽 소장을 불러 몇가지 과제를 주었다.

구미에 전자공업단지를 조성하는 안 2제1단계로 약30만~40만평 조성
3공장대지 불하가격이 평당 3천원이하로 가능한가의 검토 4단지에
포함시켜야 할 시설 5단지조성계획 도면 6FIC에서 공단조성을 실시할수
있는가에 대한 검토등이었다.

FIC는 즉시 직원을 파견,검토했는데 결과는 원칙적으로 좋다는
의견이었다. 우선 한번에 30만평을 조성하는것보다 2단계로 나누어
하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유는 현재 한국전자의 동쪽에는 표고 40
가량의 야산이 있는데 야산의 낮은 쪽을 먼저 조성하면 공사도 용이하고
시간적으로 빠르다는 것이었다. 단시일내에 시공하여 공장 입주를 빨리
시작하자는 계산이었다. 야산이 높은 쪽은 시간을 두고 흙을 깎아 내려
저습지를 메워서 사용하는 쪽이 좋겠다고 했다.

결국 제1단계 공사는 18만평을 구입해서 조성하게 된다. 기존 한국전자의
부지와 합해서 약26만평의 전자공업전문 단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대지조성비는 평당3천원을 넘지 않을 것으로 조사됐고 공단본부 청사를
짓되 세관 우체국 은행 통관사를 유치해야 하며 보세창고도 필요하다는
안이 제시됐다.

또 공장을 지을 시간적 여유가 없는 업체를 위해 임대 공장건설을
허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단지 주변에 국민주택자금으로 민영주택을 건설해서 개발초기의 주택난을
해소하고 공단에서 부품수입 판매를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안도
나왔다. 전자공업에는 다종 소량의 부품이 필요하다. 예로 TV를 만드는데
수많은 종류의 부품이 들어가지만 부품별로 보면 어떤것은 하나만 필요해
수입단위가 안될때가 많다. 이런것은 극히 소량이라 수입상이 취급도 안해
줄뿐더러 꼭 수입을 부탁하면 값을 엄청나게 달라고 한다. 수량을 많이
수입해가지고 조금씩 써나가면 되겠지만 당시에는 TV 1백대를 만들려
한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부품만 수입허가가 나와 어려움이 많았다. 만약
부품 하나가 불량품이거나 실수로 망가뜨리게 되면 TV한대를 생산하지
못하게 됐다. 조그마한(값도 얼마 안되는)부품 하나가 부족해서 제품이 못
나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러가지의 부품수입과정에서 한두가지가 몽땅
빠지게될 때에는 다시 수입될 때까지 공장작업을 일시 중단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공단이 상공부승인을 얻어 소소한
부품은 일시에 수입해서 비치했다가 공장에 공급한다는 안이 나온 것이다.
값도 싸게 구입하고 필요에 따라 공단입주자에게 긴급 공급하자는 좋은
의견이었다. 박승엽소장이 공군복무시 보급창소장을 한 경험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정밀기기센터 공사맡아--

기간도로망 구축에서는 공단 진입로를 동.서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내 장차
건설될 구미대교와 연결시키고 남.북선은 동서기간도로와 직각으로 만드는
것으로 제시됐다. 제1공구 조성시 그 윤곽을 결정지어 장차 구미공단
확장과 더불어 만들 모든 도로를 이 양 기간도로와 평행하게 설치하자는
안이었다.

예산은 약4억원으로 잡았고 FIC에서 조성공사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나는 곧 이 안을 정리해서 이낙선장관에게 설명했다. 이장관은 구미에
공단을 만든다는데 적극적이었다. 김정 실장에게 보고를 했다. 김실장은
"대통령 짐을 덜어 드릴수 있게 되었다"고 만족해 했다. 이후 박대통령에
대한 브리핑은 수월히 통과되었다.

드디어 71년5월20일 한국전자공업공단이 설립됐다.

상공부가 한국정밀기기센터에 전자공업의 육성과 수출진흥을 위해
한국전자공업공단을 조속히 설립,전자공업단지의 조성과 운영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가 있은지 약1개월여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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