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문화인물 안중근(1879~1910)은 우리국민이라면 누구나 잘아는 독립
운동가다. 정부가 안중근 의사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것은 그의
헌신적인 생애와 업적을 오늘에 재조명하며 그의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기리고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드높이고자하는데 있다.

안중근은 조선조말인 고종16년 9월2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씨 사이에서 3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응칠이고 본관
은 순흥.

어린시절에는 서당에서 9년간 한학교육을 받았고 19세때 프랑스인인 비레헴
(한국명 홍석구)신부로 부터 도마라는 본명으로 가톨릭의 세례를 받았다.
안중근은 그때까지 쌓은 한학지식과 유교교양 에다가 천주교라는 종교를
믿게되어 서양 선교사로부터 프랑스어는 물론 유럽을 비롯한 외국에 관한
새로운 문화와 지식을 얻게 되었다.

안중근은 1906년에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평남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
학교를 세워서 민족교육에 헌신하였고 1907년에는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서
이범윤 김두성등과 함께 의병을 양성하여 참모중장겸 특파독립대장으로 의병
을 이끌고 일제와 싸웠다. 이때 안의사는 "뿌리없는 나무는 없고 나라없는
민족은 없다 "고 역설하여 동포의 큰 호응을 얻었으나 일제의 강대한 무력
앞에서 항일투쟁은 쉽지 않았다.

그런던 중 노.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한국을 합방하고 만주를 손에 넣을
계획으로 1909년 우리나라 침략의 주도적 인물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를
만주 하얼빈에 보내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갖게 하였다.

안중근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일제
의 흉계를 세계에 알리려고 이토를 하얼빈역에서 포살하고 1910년 여순감옥
에서 순국하였다.

후일 일본에서는 안의사의 업적을 폄하 하기위해 이토가 죽기직전 "범인이
누구냐"고 물어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바보같은 녀석"이라고 말하고
죽었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최서면씨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토는 단지
"당했다. 총알이 깊이 박힌 모양"이라고 신음하면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제 일본 교과서까지도 안의사를 독립의 투사로 소개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를 기리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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