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그룹이었나 **
국제그룹은 해체당시인 지난85년2월 종합무역상사인 국제상사등 23개 계열
기업으로 구성돼 있었다.

83년 결산자료를 토대로 재계 랭킹을 매기면 국제그룹은 매출액(1조8천9백
54억원)으로 따져 6위,자산규모 (1조4천4백50억원)로 8위,금융기관 여신규모
(1조2천4백3억원)로 7위인 대기업 그룹이었다. 해체당시 종업원수는 3만8천
8백명에 달했다.

무역 철강 건설 시계 증권 방직 제지 해운 섬유 운수 호텔등 다양한 업종에
진출했던 국제그룹은 일제때 쌀장수 정미소업으로 목돈을 마련한 양정모
회장이 선친 양태진씨 (작고)와 함께 지난48년4월 부산에 국제고무 공업사를
설립 하면서 창업됐다. 당시 모든 생필품이 달리던 시절 "왕자표"고무신은
치열한 경쟁에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60년3월 부산 제2공장의 화재를
비롯 3차례의 화재로 막대한 피해를 본데다 새로 설립했던 진양화학의
경영권을 동생 규모씨에게 넘겨주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를 계기로 부친으로부터 경영권을 이어받은 양회장은 그뒤 부산사상공단
에 단일공장으로는 세계최대의 신발공장을 건설했다. 양정모씨가 본격적인
"재계인물"로 발돋움한 것은 60년대말부터 불어닥친 신발수출 경기를 타고
부터. 72년8월 정부가 대농 등에 주기로 사전에 각본을 짠 삼호방 대전공장
경매에 뛰어들어 이를 낙찰,재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면서 부산지방에서
"중앙재계"로 본격 데뷔했다.

이때 삼호방은 결국 인수를 하지 못했으나 막후협상에 따라 방직공장 설립
인가를 받았다. 또 71년 성창섬유를 비롯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
등을 잇달아 설립했으며 보국증권(동서증권 전신) 동우산업 국제제지 조광
무역 원풍산업을 인수했다.

74년11월에는 국제상사가 종합 무역상사로 지정되는 급상승 기류를 탔다.
77년2월에는 권철현씨 계열의 연합철강 연합물산 연합통운 연합개발 등 4개
업체 경영권을 인수,대기업그룹으로서의 면모를 완벽히 갖췄다.


** 해체에 얽힌 사연 **
국제그룹의 해체에 대해 당시 정부와 은행측은 신발업의 과당경쟁에 따른
채산성악화 해외건설업의 위축,신사옥 건축에 따른 자금압박,연합철강분쟁,
가족중심의 경영체제상 문제 등에 따른 부실화를 이유로 들었다.

당시 국제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의 이필선 행장은 국제그룹의
해체가 정치적 희생물 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터무니 없는 말" 이라면서
국제의 해체정리는 경제원리에 충실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국제그룹해체를 위하여 한 일련의 공권력 행사는 청구인의 기업
활동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한 것" 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주문에
나타나듯이 공권력이 상당부분 개입됐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88년말
국회의 "5공비리청문회" 와 89년1월의 대검찰청의 5공비리 수사발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국제그룹해체 당시 재무부장관을 지냈던 김만제씨는 88년말 검찰에서
"국제그룹해체는 전두환전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당시 국제그룹의 해체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수 있지만 양회장은 몇가지
"괘씸죄"가 그룹해체의 최대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양회장은 그룹해체이후 기자들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시 제일은행
장이 앞장을 섰고 그위에서 공갈과 협박을 가해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
했다.

해체원인에 대해서는 결코 부실기업의 문제가 아니고 일해재단 성금문제,
새마을 성금문제,청와대 연회건 등이 당시 권력핵심부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누차 강조해왔다. 특히 일해재단에 대해서는 "재단설립을 맡았던
최모씨가 84년초 나를 방문해 재계를 통해 3년간 3백억원을 모집 한다고
했다.

나는 당시 기업사정도 어려운데 너무 부담이 클것이라고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며 "당시 국제는 5억원을 냈지만 국내 유수기업인 S,H,L그룹은
12억원씩,D그룹은 10억정도를 낸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새마을 성금등을
내는데 국제그룹은 "인색" 했던게 사실이다.

국제그룹 해체이후 자기회사보다 규모가 더 큰 연합철강을 인수한 D제강이
83년 새마을성금과 심장재단 기부금 등으로 모두 30억원을 헌납했던 반면
국제그룹은 그 10분의1에 불과한 3억원의 새마을성금만 냈다.

양회장은 또 84년7월 9년동안 부산상의 회장직과 함께 맡아오던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부산지부장직을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전경환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임했었다. 이와함께 84년말 청와대의 대기업그룹 총수 초청만찬
에 지각한데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부산방문시에도 결례를 해 "불경죄"를
저질렀던 것도 그룹해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당시 그룹해체가 꼭 정치적 희생물만은 아니었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

일부에서는 국제그룹의 몰락이 연합철강 주식을 상당수 보유했던 권철현
씨가 그룹경영과 관련,양회장을 배임으로 걸어 민사및 형사고발했던 84년
부터로 보고 있다. 외환관리법등 위반혐의로 구속됐던 권씨로부터 이들
4개사를 인수할때 건네진 인수자금은 5억원. 권씨가 "자산 1천억원짜리
회사를 단돈 5억원에 빼앗겼다"며 들고나서면서 단자의존도가 높았던 국제의
자금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권씨의 친척으로 연철을 양회장에게 넘길때
대리인으로 계약서에 서명했던 권익현씨가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이었다.
때문에 국제에 무슨 일이 날지 모른다고 봐 단자사들이 대출을 꺼린것.

권씨의 고발로 연합철강 역대사장은 물론 양회장도 서울시경에 직접 출두,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이를 적신호로 받아들인 단자회사들이 국제그룹
어음을 연장해주지 않고 마구 교환에 돌리기 시작,자금난이 표면화됐다.

국제상사는 84년말 단자사가 돌린 어음을 막지못해 1차부도를 냈다.
거래은행인 제일은행과 상업은행은 서로 구제금융부담을 피하려고 줄다리기
를 했다. 84년말 제일은행이 주거래은행으로 되어있던 8개 계열사의 차입금
만도 1조1천6백52억원,계열전체로는 차입금이 1조3천7백85억원에 달했었다.

국제그룹은 3남11녀를 둔 양회장의 사위5명이 부회장(다섯째사위 김덕영씨)
국제상선 사장(둘째 이대황씨)동서증권 부사장(넷째 김 영씨)국제상사
생산담당 사장(첫째 한윤구씨.당시 퇴진)국제상사 부사장(셋째 김정형씨.
당시 퇴진)등 요직을 맡아왔다.

이같은 가족중심의 경영체제가 경영관리의 부실을 초래,신발경기퇴조등의
경제적 변동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으며 특히 관리능력 미흡에도 무모하게
그룹을 확장했던 것이 비극을 부른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 있다. 또 초단기
완매자금으로 사옥빌딩을 지은 것등이 경영부재의 실례이며 양회장이 중앙
무대에 폭넓은 관계를 맺지 못했던 것도 그룹해체의 사태를 낳은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 국제 그룹을 인수한 화사들 **
국제그룹의 "알맹이 계열사"를 인수한 기업으로는 한일그룹 동국제강
극동건설 등이 꼽힌다.

이중 한일그룹은 국제그룹의 모기업 이랄수 있는 국제상사 신발및 무역부문
과 남주개발 (제주 하얏트호텔) 신남개발 (부산 해운대호텔) 원효개발
(양산통도사 골프장) 연합물산 등 5개사를 인수했다. 한일그룹은 국제상사
등을 인수하면서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주력인 아크릴섬유 경기퇴조로
지난해 매출은 1조3천억원으로 재계서열 30위를 기록하는데 그치고있다.

한일그룹은 부산하얏트호텔 개관과 양산 종합레저타운 건설등과 함께
갈륨비소 반도체 사업,석유화학 부분의 신소재 사업 등으로 발을 넓히며
"탈섬유"의 구조조정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국제계열사중 가장 알찬 기업이던 연합철강과 국제종합기계 국제통운등
3사는 동국제강으로 넘어갔다.

권철현씨 측과의 분규에 따른 생산차질 등으로 한동안 경영상 문제도
있었지만 연철은 작년에도 4천6백억원 매출에 1백18억원의 순익을 내
동국제강(매출 6천6백억원,순익 2백48억원)에 버금가는 영업실적을
기록했다.

극동건설은 부실기업이던 국제상사의 건설부문을 인수하는 대가로
동서증권을 넘겨받았다. 동서증권은 극동서 인수하자마자 증권붐이 불어
자산가치가 배가 됐다. 자본금규모는 2천8백억원이 넘는다.

이밖에 우성건설은 원풍산업 국제기술개발등 2개사를 인수했으며
국제제지(아세아시멘트서인수) 한주통상(전조광무역.서우산업)동우산업
(대양물산)성창섬유(동양고무)경남은행(마산상공인)동해투자금융(부산상의)
신한투자금융(제일은행)국제상선(서주해운)등은 개별기업이나 상공인들이
단체로 인수했다.

그러나 성신토건과 국제토건등 2개사는 인수희망자가 없어 결국 부도처리
됐었다.

<김정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