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에 접어들면서 증권파동으로 세상이 온통 시끄럽더니 초여름엔
통화조치를 단행하고 말았다. 그목적이 어디있는지는 지금도 알길이 없다.
그러나 모처럼 개복수술을 했으면 종양을 도려내야할텐데 그냥 덮어두고
말았다. 이왕 통화조치를 했으면 예금을 동결하고 지불을 유예하는것이
순서인데 즉시 다 풀어주고 말았다.

참으로 군사정부다운 발상이요,조치인것이다. 아마 상당한 규모의
유휴자금을 거두어들일수 있을것으로 생각했는데 별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되었을 것이다. 결국 그돈을 뽑아내면 다시 그에 해당한 돈을
찔러넣어야만한다. 왜냐하면 돈이란 단순한 지불수단에 지나지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치저장수단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실수를 저질렀거니와 그래도 그실정을 은폐하지않고 한달도 못가서 선선히
풀어준것을 보면 외부의 압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무렵 나의 진로에 대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때가 왔다. 5.16으로
재무부를 떠난후 벌써 1년이 가깝도록 놀고있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거나,차관까지 했으니 이제는 정치에 입문해서 장관이나 바라보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학원은 데모가 그칠줄 모르고
시끄러웠다. 이런 판국에 학교로 돌아간다고한들 환영을 받을리 없다. 또
정치에 입문하자니 국회의원이 되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된다해도
국회의원답게 명예를 지켜나가기도 어려운것이다. 나는 제헌국회때부터
국회전문위원으로 있었고 그뿐아니라 나의 선친이 국회의원을 지낸바있기
때문에 국회의원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안다. 내가 정치가가 될 자질과
능력이 없을뿐아니라 나의 적성에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진로를
결정하지못하고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던중 증권업협회에서
도와달라는 교섭이 있었다.

때마침 증권파동이 일어난후라 이를 수습하기위해 재무부와 연락이 닿는
사람을 물색하다보니 내가 지목된것 같았다. 만일 지금과 같이 증권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있었다면 증권협회로 갈리가 없다. 그러나 무지에서
오는 만용이라고 할까 겁도 없이 그바닥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의 진로를 재정에서 증권으로 방향전환을 하는데는 여간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의 꿈은 항상 신생한국의 재정제도를
어떻게하면 확립하느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후 미군정하에서 서울대학이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었다. 그래서
문리과대학이 탄생했고 여기에 강사로 출강하면서 실은 동아일보사
조사부장을 겸직했다. 그래서 해방후 걷잡을수 없는 인플레이션의
원인분석과 대책에 관하여 여러차례에 걸쳐 신문에 글을 썼다.

즉 한국인플레이션의 본질은 재정수지의 적자로 통화를 증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재정인플레라고 단정했고 이를 치유하는 방법은
재정제도를 확립하는것밖에 없다는 논지였다. 이와 대립되는 주장이
외환인플레론이다. 그러나 외환인플레론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참으로 외로운 주장이었다. 그러니 일반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말았다. 그러다 미군정이 종식되고 대한민국정부가 태동할무렵
정부형태문제를 내가 제일먼저 제기했다. 신문에 사흘을 연재한 글이 많은
관심을 끌게되어 결국 제헌국회의 재경전문위원으로 가게된 것이다.

그후 서울대상대로 자리를 옮긴다음 미국에 가서도 하버드대학에서
비교재정학을 연구했다. 이토록 나의 주변을 떠나지않고 맴돌던 꿈을
저버리고 전혀 생소한 증권분야로 가자니 나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62년 여름에 증권협회로 갔는데 그야말로 초년병으로 입대한
기분이었다. 더구나 그유명한 증권파동의 소용돌이에서 사후수습을
해야하니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부도 처음에는 임기응변으로
사태를 미봉하는데 급급했으나 결국은 64년에 이르러 근본대책을 마련하지
않을수 없었다. 즉 주식회사제 증권거래소를 공영제거래소로 개편하고
주가가 떨어지기만하는 대증주를 정부가 사들여 상장을 폐지하는 조치다.
45일간의 장기휴장을 통하여 정부가 일대수술을 감행한 것이다. 그래서
거래소의 면목은 정부의 결단으로 일신되었지만 그렇다고 그파동의
후유증이 말끔히 씻어진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후에도 10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했으니 그 과정이 결코 평탄할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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