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년간을 군사정권의 통치하에서 살아오는 동안 국민들은 군사정권의
통치행태에 너무 익숙해져왔다. 처음에는 거부감도 가졌고 눈에 거슬리기도
했던 군대식 통치와 사회전반의 군사문화에도 날이 갈수록 익숙해졌고 드디
어는 이에 무감각해져 버렸다.

어느날 청와대 앞길을 막아버리고 통행을 못하게 하면 대통령이 사는
근처에는 국민들이 얼씬거리지 못하는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인왕산에 오르는 등산길에 철책을 쳐놓고 군사보호지역이란 팻말을 꽂으면
괜히 가까이 가는것이 겁이 나기도했다.

어느날 국회의사당 뒤를 지나는 윤중로에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면
국민의대표인 국회의원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일반인들은 지나다닐수 없다고
생각하는것이 당연했었다고나 할까.

청와대앞길이나 국회의사당 뒷길을 못다니면 멀고 복잡하지만 다른 길로
다니면 그만이었다. 인왕산이 안되면 도봉산이나 관악산으로 등산을 가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총무처에서 국가고시문제를 출제하러 오라고
했을때에는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되고 꼭 정부종합청사로 가야했다.
그때마다 입구를 막고 서있는 전경에게 제지당한 후 주민등록증을 제시해
허가가 나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국민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주민등록증의 소지여부를 확인받는 것이 정부종합청사에 들어갈때마다 왜
필요한지조차 알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때마다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국민들을 위해 일한다는 정부청사에
국민들이 못들어가게 문을 닫아놓고 허가를 받은 후에야 들어가라는 나라는
이나라 외에는 세상에 또 없을 것"이라는 불만이었다.

국가안보를 위해 군대현대화와 전력증강계획인 "율곡사업"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런 것으로 알아 방위성금도 기꺼이 냈다. 국가예산의
4분의1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해도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다. 북한이
금강산 댐을 쌓아 수공작전으로 서울을 마비시켜 적화하려 하니 평화의
댐을 쌓아 이를 막아야 한다면 으레 그럴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월급에서,엄마는 반상회에서,아들은 고등학교에서,딸은
중학교에서 평화의 댐을 위한 성금이라는 명목의 돈을 3중 4중으로
압류해가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정권이 군사정권이기
때문에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국민은 아무도없었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의 최면에 걸려 모든 정권은 이렇게 하는 것이려니
생각했었고 군사정권이 아닌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조차
품지 않았다.

이제 문민정부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5개월을 살아보면서 국민들은
군사정권이 아닌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게 됐다. 청와대 앞길을
마음놓고 거닐어도,인왕산을 마음대로 오르내려도,국회의사당 뒷길을
자유롭게 활보해도,정부종합청사출입에 전경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세상은
아무일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 대통령 국회의원 정부관리 경찰 군 등이
합심해서 국민들을 제지하고 통제하고 접근을 못하게 하여 알지 못하게
하려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국민들은 이제야 깨닫게됐다. 국민들은
격리시켜 아무것도 모르게 해놓아야 뒷방에서는 율곡사업이란 이름밑에
국방장관과 참모총장들이 수억원씩의 뇌물을 챙길수 있었던것이다.
그뿐인가. 군장성진급에서는 억대의 뇌물을 받을수 있었으며 검찰은
척결해야할 대상인 지하조직의 대부로부터 뇌물을 받으며 공생할수 있었다.

일부나마 밝혀지고 있는 군사정권하에서의 엄청난 비리들은 이러한 비리를
밝히고 응징하고 척결할수있는 제도와 기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운용이 금지되어왔기 때문이다. 정당들간엔 야합을 통해 야당을
왜소화시키고 무소속의원들을 끌어들여 여당을 비대화시켰다. 또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비리에 대한 국정조사를 봉쇄했다. 검찰은 정권의 수족이
되고,사법부는 독립성을 스스로 지키지 못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군사정권하에서 부정과 불법 비리를 만연시켰다고 볼수 있다.

만일 문민정부하에서 비리가 저질러지고 이러한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방편으로 무소속의원들을 끌어들여 여당의 수적 우세를 확보한 후 이를
통해 야당의 국정조사요구를 묵살하게 된다면,문민정부는 군사정부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문민정부의 실체는 대통령이 민간인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게 아니다. 정권이 민주주의원칙에 근거하여 정치를 해나가고,또
민주정치의 운용을 보장하는 제도와 기구들이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규정된다.

문민정부가 과거 군사정권이 저질렀던 비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국민앞에 떳떳하게 공개해야 한다. 부정이나 불법,비리가
있다면 그것은 제도와 기구를 통해 밝혀지고 응징되어야 한다. 작은 예를
들어 부정이나 불법 또는 비리를 밝히기 위한 국정조사의 필요성이 있다면
그것은 야당이 아닌 여당이 앞장 서서 추진해야 한다. 이것은 문민정부가
군사정권과 다르다는 점을 국민에게 실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