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 현 기아경제연 고문

67년1월 박대통령이 전자공업진흥에 대해 강력한 시책을 펴 나가기로
천명한 후 업계는 비상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전자공업에 대한 상식이 적을 때라 우선 해외에 나가서 실태를 보아야
하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백마디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이었다.

그해 10월3일 국립공업연구소 1명등 전자공업인 15명으로 시찰단을
구성,15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업계시찰에 나섰다.

시찰단은 가는곳마다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며 일본 전파신문은 특별기사로
이들의 활동상과 한국의 전자공업을 소개하였다. 특히 대만과 홍콩에
진출해 있던 일본기업들은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하는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양국은 기술제휴등 공동 관심사에서 많은 의견의 접근을 보았다. 이
시찰단의 방일이후 일본회사의 한국진출이 적극화되는등 기업유치에 좋은
결과를 갖게된것으로 평가됐다.

미국전자업계도 시찰키로 했다. 미국 시찰단은 총33명으로 규모도 컸고
신규투자가도 많이 포함됐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이사장 한국진씨도
합류했다. 금성사 사장 구정회씨가 단장이었다. 68년3월18일부터
약20일간 돌아봤다.

"반도체시대" 직접확인
세계최대의 전자기술쇼인 IEEE쇼를 관람하고 뉴욕 워싱턴 시카코
로스앤젤레스 보스턴 샌프란시스코등지에 있는 여러 전자업체를 방문했다.
우리 기업인들이 처음으로 반도체가 얼마나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깨닫는 계기가 됐다. 이미 "게르마늄 트랜지스터"가 제2선으로 물러나고
"실리콘 트랜지스터와 IC"가 제1선으로 나서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트랜지스터 제조는 인건비가 많이 먹히기 때문에 해외의 저임금 국가로
이전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됐다. 같은 이유로 전자부품공업 역시 점차
후진국으로 이전되는 경향을 보고 나서 우리업계가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귀국후 사업방향 설정등에 이때의
경험이 유용하게 활용된 것이다.

우리나라와 경쟁국인 대만에도 가보기로 했다. (대만은 66년도에
전자제품 수출 목표 2천만달러를 달성하고 69년도에 1억달러 수출 목표를
세우고 있다는 것도 이때 알게 되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66년도 수출은
3백59만달러,71년도 수출목표가 1억달러였으며 72년도에야 이 목표를
달성하였다. 즉 우리나라는 1억달러 수출에 있어 대만보다 2,3년이 늦은
것이다. 대만의 전자공업은 당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외국 기업을 성공적으로 유치하고 있는 대만의 전자공업 실상을 조사
분석하기 위한 대만전자공업시찰단이 69년11월10일 결단식을 가졌다(단장
금성사 구정회사장).

국내 전자공업인 27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11월24일부터 7일간 대만에
체재하면서 고웅 보세구역(KEPZ),고웅 수출지역 입주 업체들을 돌아봤다.
대만전공기재동업공회(TEAMA)주최로 열린 대만 정부 관계자와 기업인
간담회,때마침 개최된 69년 아시아전자연맹총회와 아시아전자제품전시회도
참관하였다. 시찰단은 이를 통해 대만이 우리나라보다 전자공업이 앞설수
있었던 요인으로 <>저율의 금리와 풍부한 자금지원 <>간접재및 원자재
조달의 용역성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의 적극 지원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국내 전자업계가 비로소 전자공업의 실상을 알게된것이다.

전자공업의 눈부신 발전에 놀랐고 이러한 발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전자공업이란 기술은 미국에서 발전하고
있지만 제조공정은 손작업이 많이 드는 노동집약적 산업,즉 여자 기능사의
몫으로 대만 등지에서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이 분야에 대해 너무나 소홀히 해오지 않았는가. 우리실정에
적합한 산업으로서 전력투구해야겠다고 실감을 하게 됐다. 기존업자는
물론 신규 투자자가 지대한 흥미를 갖게된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사항은 상공부에도 보고되었지만 신문지상에도 소개됐다.

전자공업육성에 대해 언론계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각 신문사의
과학부장들이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역설해 주었다. 이런 일은 드문 예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전자공업이 지지부진하니 언론계에서 채찍질하는
것같은 감이 들 정도였다.

전자공업육성에 대한 언론계의 관심이 각별했던 것이다. 이런일이
있었다. 68년 가을 상공부 공업2국의 박임숙국장은 이들 과학부장들이
협조를 잘 해주어서 고맙다고 술자리를 마련하게 됐다. 한국일보의
심승택씨(전 과학진흥재단 초대전무.별세) 서울신문의
현원복씨(현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 중앙일보의 이종수씨(전 과학기술처
초대 대변인,주일대사관 과학담당관 역임) 동아일보의 김재관씨(현월간
자동차생활 발행인)경향신문의 김귀제씨(현일본 동화신문편집국장)등
쟁쟁한 멤버였다. 김완희박사와 이태구조합상무도 합석했다.

술잔이 돌고 돌아 가는데 술자리에서 흔히 있는 실없는 주담은 나오지
않고 전자공업육성에 대해 열을 올렸다. "우리나라 전자공업이 이래서야
되겠느냐"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취하게 되니 한사람이
식탁에 놓여 있는 얼음덩어리를 집어 들고 식탁에다 마구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얼음 한덩이가 식탁에 맞고 튀면서 박국장 얼굴에 직통으로
맞았다고 한다. 얼음은 아기 주먹만한 것이어서 박국장 이마에는 곧 큰
혹이 생겼다. 박국장은 당시도 연세가 좀 많으며 전통적 양반성격이어서
참고 마셨는데 그 혹은 며칠 갔다. 그래도 각 부장은 사과하기는 커녕
"전자공업부진 탓"으로 돌렸다고 한다.

대만보다 크게 뒤져
또 당시 서울경제의 심용택기자(별세)는 68년 방미전자시찰단일원으로
미국에서 전자공업의 현황을 보고는 전자공업에 큰 관심을 갖게됐다.
돌아오자마자 신문에 전자공업육성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심지어 69년 서울경제신년특집중 그해의 10대과제에
"전자공업육성지원"항목을 넣기도 했다(심기자가 그후 타계하였을때 모든
전자공업인들이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전자공업에 대한 사항은 물론 박대통령에게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보고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박대통령의 관심이 높았던 분야였던 만큼
이러한 보고 "특히 대만의 전자공업이 눈부시게 발달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상당히 언짢게 느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상공부나 업계에서 무엇들을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냐?"하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69년 6월초 청와대로부터 상공부에 전자공업육성 방안에 대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김정염장관은 직감적으로 이 보고의
중요성에 대해서 어떤 예감을 느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전자공업
담당국장(69년6월11일 문병하씨 취임)과 과장(68년 12월18일 임동준)을
불렀다. 그런데 이들 두사람은 모두 새로 취임해서 전자공업에 대해
파악이 잘 안된 상태라고 생각했던지 나(필자.당시 기획관리실장)도 불려
갔다. 김장관은 "이번 전자공업육성 보고는 잘 되어야지 잘못하면 상공부
전체가 기합감인데 오실장이 수고를 해주오. 국장 과장도 잘
협조하소"하는 것이었다. 내 소관이 아니지만 장관지시이니 못한다고
할수도 없었다. 국장 과장도 상공부 처지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니 "우리
둘이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뛸 터이니 부탁합니다"한다. 먼저 브리핑
자료작성을 시작했다. 정말 헌신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이중 임동준과장
윤정우계장등 여러 직원은 며칠 밤을 새웠다.

나는 우선 66년에 발표한 상공부 전자공업 육성방안을 가져 오라고 해
여기에다 내가 주로 쓰는 "임팩트 폴리시"와 "목돈작전"을 쓰기로 했다.

(1)우선 전자공업 육성계획기간을 8개년으로 잡았다. 전자공업은 아직
미개척 분야인데 5개년계획으로는 시간상 너무 촉박하다. 더욱이 69년
6월부터 출발한다면 제2차 5개년기간인 71년도까지 2년반 밖에 남아 있지
않아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목표연도인 76년까지로 잡은 것이다.
71년까지를 제1단계 3개년계획,나머지를 제2단계 5개년계획으로 구분한다.

(2)제1단계인 3개년계획에서는(이미 66년 5개년계획때 발표한
대로)71년도에 1억달러 수출목표,제2단계인 5개년계획에서는 73년도에
2억달러 76년도에 4억달러 목표를 달성한다.

"임팩트 폴리시"적용
(3)다음이 "임팩트 폴리시"적용이다. 모든 업종을 느슨하게 도와주면
안된다. 개발품목을 엄격히 선정해 놓고 이 품목에 대해서 집중지원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다음(표참조)과 같이 제1단계인 3개년간에
62개품목을 선정했다. 이 품목선정에는 윤정우계장과 FIC,그리고
전자공업협동조합에서 진지하게 토의해 가며 골라 나갔다. (딴 곳과는
상의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또 상의해 보았댔자 뾰족한 의견도 없을
때이다)
제2단계인 5개년기간에 33개품목을 추가키로 했다.

총 95개품목이 선정되었다. 이것을 제품 성격별로 구분하면 m전자기기가
54개품목 2전자부품이 29개품목 3전자재료가 12개품목등 모두 95개 품목이
된다.

"임팩트 폴리시"라는 것은 업자부터 선정하는 것이 아니다. 품목부터
골라야 한다. 특히 개발초기에는 국내에서 아직 생산이 안되는 것도
있으니 이럴때는 정부에서 개발토록 유도해 나가야 한다. 이런점에서
1966년도의 5개년계획 안(안)과는 방향이 다르게 되었다. 품목이 정해진
후에 업체 선정이 뒤따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