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선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아홉구(구)자 솥정(정)자로 솥을 아홉번
걸었다해서 구정인데 그는 원래 삼베 장수라 매일 삼베를 짊어지고 이 장
저 장 팔러다녔다.

때는 삼동 어느날,이날도 장을 보기 위해 산길을 걷다가 피곤해서 길가에
잠시 쉬고 있는데 저만치서 중이 한사람 오고 있는것이 보였다.

혼자 심심하던 차에 슬그머니 장난스러운 생각이 나서 가지고 있던 삼베
한필을 슬쩍 길 가운데다 놓아두고 숲속으로 숨어들어가 "저 중이 어떻게
하나"하고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중은 본체도 않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걸 본 삼베장수는
그 중의 태도가 너무 놀랍고 뜻밖이어서 그 길로 쫓아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사죄한 후 제자가 되어 모시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애걸 끝에 겨우
따라와 보라는 허락을 얻고 그 스님을 따라 저녁 늦게야 도착한 곳은 다
쓰러져 가는 조그만 토굴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그 스님은,
"자,이제 식구가 늘었으니 솥을 걸어야겠는데 저기다 이 솥을
걸어보겠는가"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내 솥을 거는데 애써 걸어놓으면 이렇게 걸어서는 안된다고
부셔버리고는 다시 걸라 하고,또 걸어놓으면 역시 잘못 걸었다고
부숴버렸다.

날은 몹시 추운데 밤새도록 이렇게 솥을 고쳐 걸기를 아홉번을 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추호의 불평도 없이 스님의 명을 받들어 아홉번만에 드디어
합격을 하여 "구정"이라는 호를 받고 마침내 중이 되었다.

그후 그는 무슨 무슨 경을 배우거나 별다른 법문을 듣는 일도 없이 그저
나무하고 밥짓고 옷깁는 일등 여러 십년동안을 시봉만 하였다. 그러나
자기 스승을 믿고 공경하는 정성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

어느해 스승이 병이 들어 점점 위중하게 되자 더욱 정성을 다하여 간병에
진력하던중 홀연히 마음이 열려 큰 깨달음을 얻고 스승께서 어느 한날
한시도 가르치지 아니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의 풀잎에는 온세상이 다들어 있다고 한다. 또 아침이슬 한방울에
우주가 들어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볼수 있는 이,과연 몇이나
있을까.

구정선사와 같은 믿음과 정성이 요즘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갖가지 화려한 유희와 한탕주의가 휩쓸고 지난 길목마다엔 제맡은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땀에 절은 소매로 다시한번 이마를 훔치는 이들도
있다.

우리들의 일상은 항상 경이롭고 힘찬 것은 아니더라도 땀방울에 묻어오는
작은 보람들은 늘 숨길을 고르며 꾸준한 성심의 손길이 와 닿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손길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나가는
소중한 이웃이며 마음의 눈을 열어가는 오늘의 구정선사이다.

작고 소박한 일이나마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쏟는다면 바로 그 곳에서
삶의 가치가 하나의 풀잎,한방울의 이슬속에 오롯이 빛날 것이다.

작은 가치와 보람들이 알알이 모이고 쌓여갈때 아침이슬속에 들어있던
깨끗한 세상,맑은 우주가 마침내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정말 자신을 사랑하고 가족을 아끼는 이라면,다정한 친구와 정겨운 동료를
진정 얻고 싶은 이라면 많은 욕심에 흔들리지 않는다. 생활이 힘들어도
가난한 마음가짐으로 안으로 향하는 차분한 눈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바라는 사람이라면,구정선사가 쏟았던 그러한 믿음과 정성 없이
어찌 결과를 바랄 것인가.

장난삼아 놓았던 삼베를 거들떠보지 않은 사실만으로 평생 존경하고
따를수 있는 스승임을 의심치 않았던 구정선사의 믿음은 사람의 진정한
가치와 무게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때 이나라의 지도층으로 불리던 사람들에 대한 갖가지 어지럽고
불미스런 소식들이 마음을 어둡게하는 요즈음 구정선사와 그 스승같은
이들이 새삼 그리운것도 그 때문이다.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것은
사람됨의 기본이다. 기본을 지키는 일이 소중함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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