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정부가 누진적소득세율을 인하하고 물품세와 관세를 주축으로
누진적소비로 개편한것은 물론 정부의 세수를 늘려보겠다는것이
주목적이었지만 멀지않아 변경될 유동단일환율제를 확립하는데 방파제의
구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세법심의가 한창이어서 그전모가 들어나기 시작,미측과도 환율에
관한 협상을 할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평상시 같으면 환율에 관한한
한국은행이 주동이 되어 IMF와 협의할 문제다. 그러나 그당시만해도
미국의 원조가 절대적이었기에 우선 미측과 협상해야만 했다. 협상이
타결되면 환율수준과 구조에 대해 세계은행이사회에 승인을 얻는다.

이와같은 IMF와의 절차상의 문제는 나로서는 생소했기 때문에 한국은행의
도움이 필요했다.

곧 세계은행으로 가게될 신병현한국은행조사부장과 경제공사로 내정돼
미국으로 부임할 김정류 전이재국장의 도움을 받았다. 정부측에서 나외에
김영록이재국장이 협상에 참여했다. 나의 상대역은
파파노경제참사관이었다.

미국대사관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비밀회동을 가졌다. 비밀을 유지하는데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미국대사관에서 회의를 하는것이 비밀을
유지하기에는 가장 좋았지만 소정시간에 차를 먼데에 두고 따로따로
참석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오랜시간 회의를 진행하다보면 끝난후
그대로 헤어지기가 섬섭했다. 같이 회식도 하고 싶었지만 한번밖에 그런
기회가 없었다. 또 정부로서는 농림부 부흥부의 실무자와도 접촉이
필요한데 사무실을 떠나 한은회의실이나 농협회의실을 이용할수밖에
없었다.

우선 나의 상대역인 파파노참사관에게 그동안 유동단일환율로 변경하기
위해 한국측이 준비한 내용부터 설명했다. 예산의 기준환율을 8백대에서
1천대로 올린것은 예산편성을 위한 잠정적인 산출기준이지 우리가 환율의
수준을 결정하는데는 조금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역설했다.
환율의 단일화를 위하여 물품세와 관세의 품목을 대폭적으로 확대하고
차등세율를 채택한 내용까지 설명했다. 그러고도 부족하면 상계관세까지
적용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역설했다.

또 환율의 유동화를 위해서는 자동장치가 마련돼있었다. 그 조건과
내용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조건과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여러차례 회의를 거듭하는 가운데에 드디어 결론이 났다. 미국측의
실무진을 대표해서 파파노경제참사관이 논평했다. 한국측이 준비한
여러가지 조치에 찬성하나 상계관세만은 찬성할수 없다는것이었다.
단일환율의 유지를 위해서는 상계관세가 필요하지만 유동화에는 방해가
된다는 논지였다. 이점에대해 오랜시간 논란이 있었으나 우리가 조처럼
양보할것같지 않으니까 그런 선에서 결말을 짓자고했다. 나의
환율현실화에 대한 집념과 성실한 태도를 높이 산것같다.

이제는 IMF와의 절차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단계에 들어갔다.
신병현조사부장과 함께 이문제도 마무리를 짓고나니 며칠후면 미국무성의
피터슨차관보가 올터이니 다시 만나자고 했다.

피터슨차관보가 서울로 온다기에 여의도비행장까지 마중하러 나갔다.
그가 도착한 다음날 차관보의 초대로 나와 김용식외무차관이
회식한것외에는 세차례의 회담만으로 현안의 환율문제해결에 종지부를
찍게됐다.

두번째회담에서 나와 김영록이재국장과 세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피터슨차관보가 1천6백대를 제안하는것이 아닌가. 나자신도
1천3백대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토록 성의를 다했는데 그럴수가
있나싶어 참으로 야속할뿐이었다.

이문제는 장관과 상의하기전에 확답을 할수없다고 거부하면서 그자리를
떴다. 김장관에게 달려가서 그이야기를 한즉 몹시 기분이 상한것 같았다.
결국 매카나기미대사의 거중조정으로 1천3백대로 해결이 났다. 그래서
결국 세번째회담에서 1천3백대1의 환율인상에 합의를 보고 그대신 미국이
한국에 대하여 통화안정기금으로 6천만달러의 원조공여를 약속했다.
이에대한 미국대통령의 공식성명문안까지 보여주며 의견을 묻기까지했다.

환율인상을 단행하는 바로 전날밤 11시쯤 긴급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자정을
전후하여 환율인상을 의결하기에 이르렀다. 김장관이 총리와
경제장관에게는 사전에 통고를 한것같다. 또 총리는 익히 알고있는터라
상정안건을 알리지않고 국무회의의 소집을 총무처에 지시한것같다.
총무처장관의 불평이 있었으나 별말썽없이 넘어갔다. 국회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특히 언론계의 비난이 컸다. 불과 몇달사이에 두번씩이나 환율을
인상하니 경제에의 혼란은 말할것도 없고 물가는 걷잡을수 없이
올라갈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4.19에서 5.16까지의 1년이 해방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물가가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고 단언할수 있다. 곡가를 빼고는 물가지수가 0.6포인트
밖에 오르지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