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 오원철 전 청와대경제수석, 현 기아경제연 고문

윤정우씨는 김기형박사(당시 경제과학심의회위원,현재 과학기술원이사장)
가 미국에서 집적회로(IC)를 갖다가 박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 아닌가 하
고 생각,어느날 김박사한테 전화를 걸고 집으로 찾아 갔다.
그때 김박사가 "우리나라 전자공업 육성방안을 성안중"이라고해 윤씨는
"지금 당장 발표하면 상공부 입장이 곤란해지니 의견을 주시면 이것을
상공부안에다 삽입시키겠다"고 하고 6개월간의 기한을 얻었다고 한다.
김박사가 소지하고 있던 일본의 전자공업10년사라는 책도 빌렸다.

얼마후 김기형박사는 박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유럽 시찰을 떠나게 되었다.
존슨 대통령이 66년 10월31일~11월2일 방한,한국에 선물을 주고 갔는데
과학기술연구소를 짓는데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군을 월남에 파견한데 대한 성의표시였다. 박대통령은 과학기술연구소
뿐 아니라 과학기술진흥 정부기관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선진국의 정부기관
실태를 조사보고하라고 해서 시찰에 나선것이다. 이래서 과학기술처가
탄생하였다.

그후 최규남 김기형위원이 작성한 전자공업육성방안은 상공부의
전자공업육성 5개년계획이 나온 후인 67년 3월8일에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정밀기계 센터의 전자공업진흥부장이었던 김세진씨(현 미국 샌프란시스코
거주)와 차장이었던 송태욱씨(현 한영전자 전무)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66년(날짜미상)일본 경단연(경제단체연합회) 동광회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동지(도시바)회사의 사장이다. 이때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안내한 사람이 곽태석씨였다. 곽씨는 박대통령과 같은 고향인
선산출신으로 국민학교 동창관계라고 했다. 재일교포로서 축수석(계치기
시계 등에 들어가는 보석)을 제조해서 도시바에 납품하고 있었고 구로동
수출공업단지에 동일한 제품을 생산하는 싸니공업(주)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곽씨로부터 동광회장이 박대통령에게 한국에 가정용 전자제품및
부품공장을 건설할 것을 권하면서 앞으로 세계는 전자공업시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들었다.

대통령도 노동집약적 산업이고 수출도 가능하다는 설명에 몹시 솔깃했다고
한다. 그후 곽씨는 구미공업단지에 한국 도시바(주)라는 회사(일본
도시바와 합작회사,트랜지스터 생산)와 한국 TV(주)(일본 도시바와
합작회사,TV 오디오 생산)를 설립하게 되는데 건설 초기에 박대통령이 직접
시찰하였다. 어쨌든 66년도에 전자공업의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쯤 전자공업육성의 필요성,선진국의 산업동향등 각종
정보들이 여러계통에서 청와대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던가 느껴진다.
그렇게해서 박대통령은 전자공업육성에 대해서 확신을 갖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는 박대통령이 67년부터 그처럼 강력하게
전자공업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박대통령도 강한 확신
또 한가지의 증언이 있다. 당시 국내에서는 계치기기에 대해 황무지였다.
고장이 나도 수리할 곳은 물론 정밀가공은 더욱이나 할수 없었다. 정부는
그래서 이런 사람을 우선 양성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유네스코에
요청,유네스코자금과 우리나라 재정자금으로 한국정밀기기센터(FIC)를
설립케 됐다. 초대 소장은 박승엽씨(현 한영전자회장)로 창립공로자다.
그는 우리나라 표준사업의 대부이기도 하다.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발상력이 있고 추진력도 강하다. 기술자출신으로서 우리나라 전자공업육성
초창기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서울공대 전기과 제4회 졸업생이다보니
FIC에는 자연히 전기과졸업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박소장은 김완희
나인균씨(전FIC뉴욕 초대전자진흥 사무소장)와 동기동창이다. 김세진
한소용씨(전 FIC 동경 초대 전자진흥사무소장)와도 동창이며 친구사이이다.

어느날 FIC에서 일하는 서울공대 전기과 동창들이 모여 한담하던중
"김완희씨가 미국에서 유명한 교수가 되었다고 하니 한번 불러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김박사는 64년 여름 방학때 모교인 서울공대에서 강연을
했고 이후 상공장관 초청으로 온적이 있다.

나인균씨는 KIST로 최형섭소장을 찾아가 "김완희박사는 한국 KIST를
설립하는데 공이 큰 사람입니다. 존슨 대통령의 방한에 앞서 백악관
기술담당 보좌관이 김박사를 찾아가 방한시 무슨 선물을 주고 싶은데
과학계통으로 무엇이 좋겠소하고 의견을 물으니 과학기술연구소 같은 것이
좋을것 같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초청해 보시지요" 이렇게해서
김완희박사의 초청이 이루어졌다.

사실 박대통령은 KIST설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직접 챙겼다. 최형섭
원자력연구소장(전에도 나왔지만 상공부 광무국장에 차출되기도 했다)에게
KIST 설립에 대한 총 책임을 맡겼다. 최박사는 참으로 적임자였다.

최박사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고참측에 속한다. 과학자
기술자들간에는 서열이 있다. 후배가 선배를 뛰어 넘는 식의 인사배치는
금기사항이다. 당시만해도 미국에서 학위를 취득한 사람의 긍지는
대단하였다. 다른나라(예로 일본이나 국내)의 박사학위와는 차별을 두려고
할 때이다. 최박사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데다 미국정부의 행정업무에도
관여한 경험이 있다. 공무원급수도 높은 편이었다. 특히 사심이 없고
따라서 돈 모으는데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진주의 명문 부자집출생).
조그마한 전세집에 살았다. 필자가 한번은 서울 종로 명륜동에 있는
전세집을 찾아간 일이 있다. 공군시절에는 나의 직속상관으로 진주의 집에
가서 저녁도 얻어 먹었으니 부인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저녁때라
저녁상이 나왔는데 콩나물국에 콩나물무침이다. 최박사가 "콩나물국만
먹다보니 자식들이 콩나물만 좋아하게 되었다"고 웃었다. 한마디로 어렵게
살았다. 부인(교사출신)이 명랑하고 대범했기 때문에 참고 견딘다고
모두가 부인칭찬을 했다. 보다못해 박대통령이 금일봉을 하사해서 겨우
자기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머리는 비상해서 순식간에 판단한다. 판단이
서면 부하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간혹 부하의 실수가 있다해도 적극적으로
감싸준다. 행정력도 있고 추진력도 있다. 또 성격은 너무나 순수해
주위사람이나 부하들은 최박사가 어떤 결정(혹 자신에게 불리하던간에)을
내려도 불평하지 않는 것이었다. 최박사는 소화가 잘 안된다고 항상
약봉지를 갖고 다녔지만 사실은 무술가였다. 일본 강도관
유단자(당수도)이다.

공군시절 이런일이 있었다. 동료장교와 깡패 사이에 싸움이 벌어질 순간
최박사가 나섰다. 첫마디가 "일본 강도관,당수<>단 최형섭"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자세를 취했다. 깡패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국군 장교라면
신분을 감추는게 보통인데 왜 신분을 노출시켰는가 물어 보았더니 일본
강도관의 규칙이라고 했다.

만일 상대방이 당수 유단자로 알고도 덤빈다면 그 쪽이 부상을 당해도
이쪽 책임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모든 점을 고려해서 최박사는
KIST의 창설및 관리자로는 최 적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66년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으로 기용되어 71년6월까지 근무한다. 그후
과학기술처장관으로 7년반 근무하게 된다. 최장수 장관이다. 그 후도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다. 1920년 11월2일생이니
금년 만73세이다. 외국의 과학기술발전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하는
국제적 명사이다. 유엔과학기술개발 자문위원으로 4년이나 위촉받아
일하기도 했다.

박정희대통령은 KIST설립에 대해서 최형섭박사의 보고를 자주 받았다.
KIST의 성격 조직,새로 세울 건물 시설물등과 특히 KIST의연구요원 확보에
대한 문제가 자주 논의되었다. 결국 우수한 연구원이 없는 연구소는
"빛좋은 개살구 격"이라고 판단,해외과학자 유치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유치과학자용 아파트촌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유치과학자들이
외로울것 같아서 한곳에 모이게 한 것이다(최박사는 과학자는 연구소
근처에 거주해야지 위락시설이 있는 곳에서는 딴전을 피우게 된다고도
했다). 물론 집세는 없었다. 또 파격적인 급료가 지급되었으며 자녀들의
전학,진학에도 특전을 주었다. 당시는 우리나라 경제사정이나 사회
문화시설,출세기회가 미국에 비할바 못되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과학자들이 귀국을 망설이자 이런 특혜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박대통령은 최박사에게 전자공업에 대해 관심을 표했다고
한다. 이때 최박사는 "그러지 않아도 컬럼비아 대학에 김완희박사가
주임교수로 있는데 이번에 초청키로 했습니다"라고 보고 하자,박대통령은
김박사가 귀국하면 우리나라 전자공업진흥에 대한 건의서를 내도록 지시를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박충훈상공장관에게도 전달되었다.

한국 1단계진입 수준
김박사는 67년 9월4일 입국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상공장관으로부터
"박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전자공업진흥에 대해서 관심이 큰데 이에 관해서
직접 보고받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해들었다. 김박사는 이튿날부터 5일간
서울과 지방의 전자공장을 시찰한후 브리핑 자료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윤정우씨가 안내를 하고 자료작성에 협조하였다. 그는 준비된 자료를
토대로 하여 9월16일 청와대에서 2시간 반동안 브리핑을 하였다.

박대통령은 이때 전자공업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고 그 보고에
만족하였다. 김완희박사도 마음에 들었다. 박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육성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달라는 용역을
의뢰하였다.

이때 보고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우리나라의 전자공업은 시발단계이다. 전자공업을 3단계로 구분한다면
우리나라는 제1단계의 진입단계에 속한다.

1단계:가정용및 지상용 통신 전자기기의 제조(한국은 제1단계의
시초이다).

일본은 제1단계를 이미 완성시켜 놓았으며 제2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2단계:전자계산기,기업합리화의 응용및 우주통신용 전자기기의 제조.

미국은 제2단계를 끝내고 제3단계에 진입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3단계:오토메이션(Automation)의 일상 생활화.

(2)우리나라 전자공업의 현황은 부품및 원자재의 국산화가 미약해서
외국에서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하고 있는 상태이다. 여자기능공의 단순
조립과정이고 전자공업에 종사하는 총 고용인원은 4천5백70명 정도인
미미한 산업이다.

(3)전자공업은 시대적인 경향에 따라 제품 수요는 급격한 증가를 보일것이
확실함. 특히 미국 시장은 71년에 2백70억달러의 수요가 될것으로 전망됨.
가정용 전자기기가 64%,부품이 21%를 차지하고 있음. 따라서 전자공업은
수출 전략 상품으로 지정하고 가정용 전자기기및 동부품공업에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할 것임.

(4)김박사는 다음과 같은 목표설정을 제시하였다. 제2차 5개년계획
최종연도인 71년에 다음사항을 달성할 것을 목표로 함.

1> 전자공업 발전의 제1단계인 가정용및 지상통신용 전자기기 부품의
산업화,생산 체계를 완수함.

2> 전자공업 발전의 제2단계의 진입에 있어 핵심요소인 반도체소자및
집적회로의 연구 개발과 제조를 완수함.

3> 내국인 제조업체(합작투자 포함)로서 전자제품(가정용 전자기기및
부품)과 특히 부품중 반도체소자 집적회로의 연간 수출1억달러를
달성하도록 적극 보호 육성함(전생산고 1억5천만달러).

4> 국방용 전자기기중 무선통신기기의 공급력을 확보함. 그리고 전자공업
을 적극 육성하면 71년에 가서 다음과 같은 효과가 기대된다고 보고했다.

5> 마지막으로 3가지 건의를 했다. 첫째 전자공업 육성법제정 둘째
전자공업육성 자금의 확보 셋째 전자산업 진흥원의 설치등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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