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오원철 전 청와대경제수석/현 기아경제연 고문

6.25전쟁이 났다. 전기가 끊겼다. 라디오를 들을수 없으니 암흑속에
있는것 같았다. 소식이 끊긴 상태는 바로 무인도에 혼자 사는 느낌이었다.
방송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느꼈었다. 9.28수복후 12월 필자는 공군에
입대,공군사관학교에 배속되었다. 미군이 무장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10분간의 휴식때 라디오를 틀면서 이런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제니스(zenith)사의 올웨이브라디오였다. 뚜껑에
안테나가 내장되고 뚜껑을 위로 여는 식의 제니스 걸작품이었다.

52년말에는 사천 공군 항공창에 배속되었다. 하루는 대구에 긴급 연락할
일이 있었는데 전화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영어를 알면 미군통신대로
가 보라고 했다. 기지내에 있는 미군 통신대에 가보니 미군하사관 한명이
지키고 있었다. 사정을 하니 "OK"하더니 곧 연결을 시켜 주었다. 물론
무선통신이었다. 즉각 연락이 됐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공군
본부가 있는 대구까지는 무선이고 그 다음은 교환을 통해야 했는데
직통으로 간단히 연결이 되는 것이었다. 미국의 앞선 기술에 기가 죽었다.
그런데 통화를 시작하고 또한번 놀랐다. 송수화기로만 통화하는 줄
알았는데 오는말 가는말이 벽에 붙은 스피커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녹음기.전축 56년에 구경
그후부터는 놀라운것 투성이였다. 레이더실에서 놀랐고 항공기내의
전자장치에 놀랐다. 무장계통(특히 Gun Sight조준기)에도 놀랐다. 그러니
일본군이 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꼈다. 56년에는 처음으로 내 음성을
내가 들었다. 녹음기를 처음 보았던 것이다. 크기가 책상서랍만 했다.
내 목소리 같지가 않고 이상하게 들렸다. 그래서 재생한 것을 한번 듣고는
되풀이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통신하사관에게 부속품을 건네주면서
전축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진공관이 8개나 들어가는 전축을 내생전
처음 갖게 되었다.

57년 제대후 시발자동차공장에 취직을 했다. 이때 일본 소니제 6석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처음 보았다. 잊혀지지도 않는다. 담배갑보다 조금
큰 빨간색 라디오였다. 어떤 손님것이었는데 억지로 뺏다시피 해서
사버렸다. 58년에 미군한테서 TV를 샀다. 4인치정도의 검은색으로 화면이
있는 전면보다 길이가 더 긴 포터블식TV였다. 미군 방송만 나와서 재미는
없었다. 신기해서 산것 뿐이었다. 이때쯤 종로에 있던 "종로소리사"와
충무로의 "기쁜소리사"가 유명했다. 확성기 전축 라디오등을 만들어
팔았고 수리도 해 주었다.

그해 가을 종로 네거리에 있는 HLKZ(한국최초의 TV방송국)로부터
출연요청을 받았다. 한국자동차공업에 대해서 30분 얘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시발자동차 공장장이었다. 방송실은 두평도
안되었는데 전면은 유리창이고 방송실내는 조그마한 책상과 의자밖에
없었다. 방음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밀폐되어 있었다. 물론 에어컨은
없을 때이다. 조명등이 여러곳에서 비춰졌는데 한증막보다도 더 더웠다.
전면의 빨간불이 켜지면 시작하고 깜박거리면 1분 남았다는 신호이니
마무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30분을 채웠다.
담당자가 잘 했다고 했다. 시청자도 별로 없을 때이니 출연료도 없었다.
RCA에서 보조하는 사업이라고 했다. 건물 밖에는 시발자동차회사에서
구경하려고 몰려온 직원들이 쇼윈도에 있는 TV를 보고 있었다. 그 TV는
10인치 정도의 작은 것이었다. 모두 박수를 쳐 주었다. 이것이 나의 첫
TV 출연이었다.

이상은 상공부에서 일하기전(1960년)까지 내가 경험한 전자와의 만남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급속히 달라지는 전자제품의 발전과정을 한
시민의 입장에서 본다는 뜻에서 적어 보았다.

이때까지는 전자제품과 일반시민과는 전화나 라디오 정도의 접촉이었을뿐
많은 거리감이 있었다.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고는 할수 없었다.
대학학과에도 전자과는 없었고 전기의 한 분야인 통신부문에 불과했다.
전기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약전계통이라고 불렀다. 상공부
공업행정도 기계과의 조그마한 분야에 속해 있었다. 전기기기공업계라는
것이 있었다. 이 계에서 통신공업까지 담당했다.

진공관 생산못해 수입
전자란 어떤 원소에도 포함돼 있다. 물질자체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우주가 생길때 부터 존재해온 것이다. 그러니 전자의 발명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전자공업"의 공업상 시발점은 진공관을 생산할 때 부터이다.
우리나라는 한번도 진공관을 만들어 본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공관시대의 전자공업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수있다.
1940년대(일제때)는 일본에서 수입해서 썼다. 기록에는 일제말기에
"진공관 수리소"가 있었다고 나온다. 필라멘트가 끊어진 진공관을
수집해서 필라멘트만을 새것으로 갈아끼우는 일종의 재생공장이었다.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를 수집하여 필라멘트를 갈아끼워 재생해서 쓰는
식이다(일제때나 건국초기에는 고장난 전구를 고물상이 돈 주고 사갔다).
진공관 재생업은 6.25전쟁때까지 범아공업에서 계속했다.

59년말 금성사에서 국산1호 라디오가 나왔다고는 하나 진공관은 수입해다
썼고 많은 부품을 수입해왔으니 단순조립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단순조립공업은 물론 여공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봉제품 만드는 것과
아주 똑같은 맥락이다. 이런 단순조립은 시중의 전파상이나 개인이 흔히
하던 작업이다. 오히려 시중의 전파상(특히 청계천주변)에서는 갖가지
전축이 꽤 많이 생산되어 시판되고 있었다. 물론 각자 자기상표를 붙여
팔았다. 오늘날 에로이카로 이어지고 있는 천일사(사장 정봉운)의
별표전축도 기억에 남는다. 필립스와 제휴한 천우사(사장 전택보)는
라디오를 생산했었다.

더욱이 확성기의 생산판매는 당시 활기를 띠었다. 자유당 민주당시절
각종 행사때나 선거유세때에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디오가 귀할때라 시골마을에서는 앰프장치를 해서 주민들이
듣도록 했다. 정치적으로 필요했고 가정에 라디오를 사주는 것보다 값이
싸게 먹혔기 때문에 정부에서 적극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앰프 방송"혹은
"스피커 방송"이라고도 불려졌다. 수신된 라디오방송을 앰프장치를 통해
유선으로 각가정에 설치된 스피커에 연결하여 방송을 들을수 있게 했던
것이다. 각 가정에서는 스피커만 설치되어 있었는데 스위치가 붙어있어
껐다 켰다 할수 있게 되어 있었다. 57년7월 경기도광주군역리에
시험적으로 설치하여 스피커 30개를 마을 집집마다 가설하여 방송을
청취하게 한것이 그 시초이다. 그리고 이런 마을을 "앰프촌"이라고
불렀다.

그후 "앰프촌"에 대한 성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고 농어민들의
라디오방송에 대한 관심과 청취욕구가 늘어나자 영리를 목적으로 한 사설
유선방송업체가 전국 지역에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민영앰프사업은 업태가 무질서했고 공공질서에 지장을 주게 됨에 따라
5.16혁명 직후에 "유선방송수신관리법"이 제정되기까지 했다. 이래서
확성기공업이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65년 확성기는 5만8천8백24대가
생산되었다. 이 숫자를 보면 확성기공업은 꽤 일찍부터 시작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66년에는 16만3천대,67년에는 28만1천대,68년에는
1백4만대나 생산했다. 68년 라디오생산은 1백18만대이니 거의 같은 양을
생산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출발점을 언제로 잡느냐하는 문제는
수월치 않다. 단순조립을 전자공업이라고 하기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좀
낯간지럽다. 우리나라에서 진공관이라도 만들었다면 문제는 간단해지는데
진공관을 만든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출발은 "진공관공업"에서는 찾을수 없게
된다. 다음 세대인 반도체제조 쪽에서 찾을수 밖에 없다. 진공관
수리시대를 생각할수 있겠지만 "수리업"을 공업이라고 할수는 없다. 마치
자전거 수리업을 공업이라고 할수 없는 것과 같다.

당시 통신공업은 상공부 기계과에서 담당했으며 그 정책이란 일본에서
부속품을 수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63년 11월 상공부에 비로소 전기공업과(전기기기공업과의 약)가
신설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전자공업을 전담하는 직원은 없었다. 통신공업계에서
곁다리로 취급 할 뿐이었다.

당시 과장은 최규배씨(현삼정사 회장)였고 통신공업계장은 백남기씨였다.
무엇인가 일을 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전기공업편람"이 처음 나왔다.

65년에 가서는 전자공업을 특화산업으로 지정하고 수출전략
산업화하려고도 노력했다.

66년 2월25일 이만희과장이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
윤정우씨(현대한 파카라이징전무)가 담당계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전자공업은 움트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명콤비였다.
이만희과장(현세호,호성정밀 회장)에 대해서는 전에 소개한 바가 있다.

이과장은 공업고등학교때는 전기를,대학에서는 행정학을 전공했다.
교제범위가 넓었으며 설득력도 있었다. 우선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 같이
토론하다보면 말소리에 눌린다. 평상시부터 남의 일을 자기일 같이
보아주니 인심을 얻고 있었다.

가전분야 추가 면모갖춰
윤정우씨는 서울공대 전기과 출신이다. 머리가 좋고 탐구적이며
전자공업에 대해서 열심히 책을 읽어 아는것이 많았다.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며 윗사람이나 동료들과 인화가 좋았다. 이래서 우선 두사람의
인적조직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나라 전자공업발전에 공이 크다.

이과장은 과의 업무에 전자공업을 추가하기로 했다. 당시 전기공업과의
관장업무는 전기.통신.전선.건전지.조명공업의 5개부문 이었는데,통신공업
분야에 라디오 TV 전축등 가전분야를 추가하여 전자공업이라고 칭했다.
전담직원은 없는 상태였다. 윤계장이 혼자 수고를 해야 했다.

당시 상공부는 광화문네거리에 있었다. 상공부 바로앞 비각옆에
의사회관이 있었는데 지하실에 "금란"이란 다방이 있었다. 상공부 직원은
아침마다 여기서 커피를 한잔하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때의
분위기였다. 과장.계장급이 주멤버였다.

나는 당시 공업1국장이었는데 아침마다 그 다방에 들렀다. 상공부
돌아가는 정보를 여기서 얻기 위해서였다.
국장급은 나혼자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새로온 마담이 미인형에 누구나 할것없이 친절히 대해 주어 모두 분위기가
좋다고 했다. 나는 그후 차관보가 되고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후에도 이
다방을 정보교환 장소로 사용했다. 청와대 면회절차가 복잡해 간단한
이야기는 여기서 만나서 의견을 교환했다. 일종의 "기술정보 아지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