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석 서울신탁은행장은 올해로 은행경력 34년째이다. 그의 프로필에는
"국제외환통"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그렇다고 그가 국제금융분야에
만 종사한건 아니다. 오히려 국내 영업을 맡았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행장이 은행에 들어온것은 지난60년 4월. 그후 상도동 지점장을
시작으로 내자동 종로1가 무교지점장등 서울시내 대형점포를 두루 거쳤다.
국제업무와 인연을 맺은것은 지난 79년2월. 로스앤젤레스지점장으로
발령나면서부터 이다. 3년간의 LA지점장을 거쳐 다시 3년동안 국제부장을
맡았다.

임원이 되기 전에 김행장이 국제업무를 맡은 것은 고작 6년 동안이다.
그런데도 그를 "국제외환통"으로 부르는 것은 상대적인 이유에서이다.
워낙 국제금융업무를 해본 사람이 없다보니 그의 경력이 돋보여서다.

김행장의 전임자였던 마당발 김준협행장. 그는 손꼽히는
"국내영업통"이었다. 김전행장은 33년간의 은행생활동안 국내를
떠나본적이 없다. 내자동 소공동 서소문지점장등 내로라하는 국내
영업점의 "사령관"을 두루 지냈다. 지점장시절 가는 곳마다 수신계수를
몇배씩 늘려 최우수 점포로 만든 신화는 유명하다. 본부 부서장을
거치지않고 지점장에서 임원으로 발탁돼 "국내영업통 시대의 개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전.현은행장의 이력이 이처럼 상반된 곳은 신탁은행만이 아니다. 최근
은행장이 바뀐 제일.외환은행도 마찬가지 다. 이철수제일은행장은 지난
59년 은행에 들어와 홍콩사무소장 런던지점장 국제영업부장등
국제금융업무를 주로 취급해왔다.

전무시절 송보열 당시행장이 외국에 나갈때면 반드시 그를 동행할 정도로
당대의 국제통으로 꼽혔었다.

반면 박기진 전제일은행장은 은행원생활중 25년을 일선지점에서 보낸
대표적 영업통이었다. 83년 수신담당상무를 맡아 연4년간 시중은행중
수신고 1위를 기록하는등 실력 또한 탁월했다. 이철수행장이 넓은 시야를
가진 "정보장교 스타일"이라면 박기진 전행장은 평생을 참호속에서 지낸
대표적 "야전관"이었던 셈이다.

허준외환은행장과 김재기 전행장도 아주 대조적이다. 허행장은
국내영업점장 경력이 거의 없는 국내의 독보적인 국제금융통이다.
국내영업경험부족이 행장이되는데 걸림돌로 작용했을 정도였다.

김전행장은 "수신왕"출신이다. 주택은행시절 영등포 남대문지점장등을
거친 그는 수신분야에 관한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던 것으로 유명했었다.

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은행원들은 누구나 해외근무와 국제업무를
선호했었다.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3년간의 해외근무는 큰
매력이었다.

그러나 선망에 비해 기회는 매우 적었다. 서울신탁은행의 경우
해외근무경험이 있는 직원은 전체(9천여명)의 2%인 2백여명 정도이다.
지난해말 현재 국내은행의 해외지점 사무소 현지법인은 모두 1백73개였다.
줄잡아 1천여명이 해외에 나가있는 셈이다. 전체은행원 15만명중 0.7%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해 우리나라에는 "국제파"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렇듯 소수의 "수혜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승진에서도 혜택을 받은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행장이
되려면 국내영업경험이 풍부하고 예금유치에 일가견이 있어야만 했다.
국제금융경험은 갖추면 좋은 "필요조건"이었지 행장이 되기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국제파는 잘해야 "2인자"였고 스태프에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관행이 문민시대의 자율분위기에 따라 이번에
뒤바뀐 것이다.

사정바람이 남기고간 마당발의 퇴진과 국제금융통의 부상. 이는 누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한 결과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국내업무 뿐만아니라 국제업무에도 어느정도 익숙해야만 최고경영자가 될수
있다는것 또한 분명하다. 금융산업개편과 금융시장개방을 앞둔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하영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