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표차이는 아니지만 국회의 인준을 얻어 장총리가 취임했다. 내각이
구성되고 재무장관으로 김영선의원이 임명됐다. 축하인사를 겸해
사무인계의 절차를 협의하러 김장관을 찾아갔다. 김장관은 누구보다도
나와 잘아는 사이다.

제2대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는데 부산에서 재정경제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나역시 재경위전문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알게 됐다. 그후 나는 국회를 그만두고 서울상대로 갔지만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을 겸직하고 있었다.

서울로 환도한후 김영선씨는 4대국회의원선거에서 실패하고 역시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왔다. 그당시 경향신문은 야당지로서 성가가 뻗어나갈 때라
주필에 이관구선생,논설위원에 주요한 김영선 이항녕씨를 참여시켜 진용을
강화했다. 이래서 다시 김영선씨와 자주 만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김영선씨는 신문사일보다 야당조직강화에 동분서주하는것 같았다.
또 한국의 미래상을 그리면서 이에 대비할 정부정책의 청사진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흥한재단의 지원을 얻어 흥한경제연구소를 만들었다. 그
연구소의 대표자가 내이름으로 돼있지만 실은 김영선씨가 만든것이다.
그때 그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으므로 자기이름을 내기가 싫다고해 내가
이름만 대신한 것이다.

연구소의 실무책임자인 사무국장은 나중에 민주당정부에서 이재국 국장을
맡은 김영록씨였다. 김영록씨는 계량경제학을 처음으로 한국에 도입하고
개발한 선구자다. 그밖에 이연구소에 참여한 분으로는 김상 이항영
이창열 조동필교수를 들수있다.

1주일에 한번식 모여 토론을 했는데 김영선씨의 최대관심사는 55년부터
한국의 부흥과 경제재건을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원조가 60년에
가면 끊기기때문에 이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 대비책은 차관도
들여와야하고 한일국교정상화를 서둘러 대일청구권자금도 받아쓸수
있어야하며 심지어 주둔미군 설비용역의 사용료까지도 미화로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급한대로 재일교포의 재산반입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대해 나의 입장은 외화의 수입이 줄어드는 추세에 있기 때문에
저환률로 고정하지 말고 실세로 현실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환율로 묶었다고해써 최종소비자에게 싸게 가는것도 아니다. 결국
중간상인만 재미를 보게된다. 또 설사 최종소비자에게 싸게간다한들 결국
외화를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환률을 경제의 실세에 맞게끔
올려서 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새 유행되는 말로하자면
시장경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금리도 역시 같다. 세제도 역시
같다.

공평과세를 위하여 종합과세를 하면 세원의 파악이 어렵다. 그렇다고
재량과세를 하면 과세의 공정을 기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하물며
누진과세에다 감면의 폭을 넓히면 그야말로 과세의 공평에서
멀어지는것이며 납세도의심와 국민의 사기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세원의 누락을 막기위하여 세금은 원천에서부터 징수해야하며
여기서 직접세는 말할것도 없고 간접세도 아울러 받아내야한다는것이다.
또 국내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보호관세체제로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이런나의 견해에 대해 김영선씨는 찬성하면서도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경제를 재건하여 자립한다는 국가대업을
완수하려면 국민으로부터 적극적인 호흥을 얻어야 한다면서 그의 평소
지론인 국토개발사업의 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소양강에서 시작해
낙동강에서 마무리짓는 대대적인 국토개발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군도 참여해야하고 군대갔다오지않은 청년,심지어는 학생까지도
동원해 참여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1주일에 한번식 모여 나라일을 걱정한다는 것은 퍽 보람있는
일이었지만 재단으로부터 지원이 끊기는 바람에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김영선씨와 나와의 유대는 오래토록 이어지면서 결국 재무부에서 다시
만나게된 것이었다.

이런 관계로 과도정부가 끝나고 새정부를 맞이하며 나는 자신의
진퇴문제를 새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또 일에 몰려 그것을 생각할
시간의 여유도 없었다. 설사 다른데로 가고싶다해도 경제현실화정책에
대한 오랜신념을 관철할수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이를 저버릴수는
없었다.

그래서 경제현실화정책에 관한한 김장관에게 따로 설명하고 승낙을
받을필요도 없이 전력투구했다. 김장관도 역시 그일은 나에게 맡기고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을 얻어다 국토개발사업을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