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풍년을 싫어하고 흉년을 좋아할 농부는 없을
것이다. 들판 가득히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주름살 가득한 얼굴은 보지 않고서도 눈에 선하게 떠올릴수 있다. 한편
태풍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안타깝게 만들곤 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흉년이 들었을때 농민의
생활이 나아지고 풍년이 들었을때는 오히려 더욱 궁핍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계속되는 궂은 날씨로 인해 어떤 해의 마늘수확이 평소의 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자. 당연히 마늘의 품귀현상이 나타날 것이고 멀지않아
"마늘값이 금값"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마늘 값이
평소의 두배 이상으로 뛰어오른다면 마늘을 경작한 농민의 수입은 오히려
더 커질수 있다.

반면에 마늘이 대풍이어서 마늘값이 폭락하면 품삯마저 건질수 없어
수확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줄지어 나타날지 모른다. 그와 같은 상황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서의 농산물의 특성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쌀 고추 마늘같은 대부분의 농산물들은 그 값이 크게 변해도 소비량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를 두고 경제학에서는
이들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가격에 대해 매우 비탄력적"인 성격을
갖고있다고 표현한다. 농산물에 대한 수요량이 이처럼 거의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공급량이 약간만 커져도 가격은 곤두박질치게 마련이다. 반면에
공급량이 달리면 가격은 천장을 모르게 솟을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농민들이 이 역설적인 상황때문에 흉년이 들었을때 오히려 덕을 보기도
했는가. 예컨대 고추의 흉작으로 말미암아 값이 솟아오르고 있을때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면 고추를 기른 농민은 한몫을 잡을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부는 이럴때면 재빠르게 동남아나 중국에서 고추를 들여와 값이
치솟는 것을 막곤 했다. 물가안정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인만큼 이를
일방적으로 매도할수는 없다.

그러나 정부가 풍년이 들었을때 값을 안정시키는 데는 그다지 재빠르지
못하다가 흉년이 들었을때 외국에서 농산물을 수입해 오는데는 제비처럼
잽싸다고 농민들이 불평하는 데는 충분한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

어느나라의 농민이든간에 배두드리며 사는 사람들은 별로 흔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날씨며 병충해며 염려해야할 일이 많은 터에 상품으로서의
농산물이 원래부터 낮은 가격탄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들에게
벗어나기 힘든 멍에가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