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말 거대하고도 강력한 새로운 조직이 짜여져 가고 있었다.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을 정점으로 하는 최고 경제참모 본부의 형성이다.
김실장이 부임할때 박대통령은 "경제는 임자가 맡으시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김실장은 비범한 행정가 였다. 과거 청와대 경제비서관팀이
행정경험 부족으로 행정부와 옥신각신한 여러가지 케이스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치에 맞지 않는 안건을 청와대 근무를 배경으로 삼아 밀어붙이는
바람에 피해를 본 경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실장은 부임하자마자 청와대 경제담당 비서관들을 행정부로
내보냈다. 새로운 진용으로 경제팀을 구성했는데 그 구성요원은 각
부처에서 차출한 가장 우수한 엘리트들이 었다. 그리고 일정기간 근무가
끝나면 그 부처의 다음 사람과 교체를 했다. 배터리같이 재충전하는
식이었다.

청와대.행정부 동질체
그렇게하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났다. 행정부와의 마찰은 커녕 오히려
청와대와 행정부는 동질체가 되었다. 가장 우수한 공무원이 배치되다보니
청와대가 보강되었다.

행정부와의 관계는 김실장의 과거 경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재무부의 엘리트 출신이자 재무부장관을 역임했으니 재무부는 무조건
복종하였다. 상공부차관.장관 출신이니 상공부입장도 재무부 경우와
같았다. 상공부 직원의 심정은 김실장을 아직도 장관으로 느꼈고 무조건
따랐다.

경제기획원은 10대째인 김학열부총리(69.2~72.1.4)시대였다.

김부총리의 성격은 좀 과격했다. 부총리 역할을 다하려고 힘썼다. 각
경제부처장관을 부하장관으로 다루려고 했다. 김부총리 부임 초기때 김정
실장은 상공부장관이었다.

문제는 경제비서관이었던 C씨가 김부총리에게 부탁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시 충주비료공장의 규모가 작아 경제성이 악화되자 시설을
배가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C비서관이 이 안을 백지화하고 울산으로 옮기는 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김부총리가 C비서관 안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상공부와
의견대립으로 맞붙게 되었다.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상공부쪽 안이 옳은 것은 당연했다. 비료공장을 더 짓기보다는 충비를
살리자는 안이었고 상공부안이 건설비가 훨씬 쌌기 때문이었다. 이미 일이
상당히 추진된후였다.

김부총리는 지기를 싫어하는 성품인데다 부총리의 힘을 과시하려고 마음을
먹었던것 같았다. 그래서 김부총리 특유의 독설이 튀어나왔다.
김부총리는 김장관에게 "강경상업 출신인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그래"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배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김장관은 복싱선수가 한대 얻어 맞은 것
같이 한순간 얼굴을 뒤로 젖혔다. 여러 부하들 앞에서 당했으니 쇼크를
받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장관은 천천히 냉정을 되찾았다. 다른말 없이
"안건이나 결정하시오"했다. 김부총리는 "좋소"하고 대꾸할수 밖에
없었다. 이긴쪽은 김장관 이었고 김부총리는 힘겨루기에 실패했던 것이다.

이일이 있은뒤 상하가 뒤바뀌었다. 김정 비서실장이 상이요,김학열
부총리가 하가 된 것이다. (직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
상황이 끝나면 그 상황에 맞춰 태도를 바꾸는 것이 김부총리의 좋은
의미에서의 장점이었다. 자기 위치를 육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김부총리는 박대통령의 직계 인맥이다. 그래서 박대통령 뜻이라면 그대로
따랐다. 김실장이 박대통령의 귀와 입이 되고 오른팔이 된것이 분명해지자
김부총리는 김비서실장의 휘하로 들어갔다. 자진 입문이었다. 그후
김부총리는 모든 것을 상의하였다.

그러나 내각에서만은 김부총리는 부총리다운 역할을 해 나갔다. 어떤
의미에선 부총리다운 마지막 부총리였다. 비상하게 빠른 머리회전과
특유의 독설로 각부 장관을 잘 리드해 나갔다. 자제분도 수재여서
경기고를 수석졸업하고 서울대에 입학했다.
그러니 툭하면 "내 자식놈 발바닥만도 못한것들"이라고 말하면서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말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꾸를 못했다.

서울대 입학이란 학부모의 간절한 소망인데 학부모 입장에서 한풀,아니
두풀도 꺾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루는 재무부차관보가 보고서 결재를
받으러왔다. 김부총리는 보고자에게 설명을 시키지 않았다. 원체
우리나라 경제사정에 밝고 경제지수에 밝은지라 혼자 읽어 내려갔다.
한장씩 넘겨가며 잘된 것에 대해서는 "으흠"하고 고개를 끄덕하고는
다음장으로 넘어갔다. 그러던중 잘못된 것이 발견되었다.

잘못된일엔 특유의 독설
김부총리는 대뜸 "이게 무엇이야"하고 벼락치듯 소리를 지르고 보고서를
냅다 던져버렸다. 마침 그 보고서는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고 클립으로만
끼워 놓았기 때문에 보고서는 온 방에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독설이 나왔다. "이<><>야,축구진흥한다고 날뛰지 말고 일이나
열심이 해"직원들도 이런식으로 자주 당했다. 한번은 한 직원이 예의 그
독설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뒤돌아서서 방을 나오려고 했다.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뒤에서 또 벼락이 떨어졌다. "이 <><>야,그쪽은
캐비닛이야,문은 저쪽이야" 이 직원은 어찌나 혼이 났던지 출입문을 연다는
것이 캐비닛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경제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고 부하를 이런식으로 다루니 경제기획원
직원뿐 아니라 딴 부처의 직원도 깍듯이 부총리로 모실수밖에 없었다.

장기영부총리가 타던 야생마도 다시 끄집어 내어 타기 시작하였다.
김학열부총리는 재임중 세상을 떠났다. 아까운 인재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더 많은 일을 할 분이었다. 국가적인 손실이 아닐수 없었다.

삼가 명복을 빈다.

필자는 제11대 태완선부총리(72.1.4~74.9.8)를 민주당 시절 상공부
장관때부터 선배로 모셨다. 부총리 시절 미국사절단으로 갈때도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그때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았는데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나는 행운아였어. 많은 일도 해보고 현직(높은자리)에도
올라갔지. 박대통령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 일할 기회를 주었어. 고마울
따름이야. 내가 할일은 박대통령의 뜻을 따르고 각 부처의 의견조정을
원만하게 하는 것이야. 일은 후배들이 하는 것을 돕는 것 뿐이고. 아마
이번 미국여행은 내 인생의 마지막 방문일지도 모르지"라고 했던것이다.
그때 태부총리는 공식스케줄을 모두 끝내고 난후 맞바로 귀국하지 않고
돌아오는 길에 LA에서 하루를 머무르며 쉬었다.

담배꽁초줍던 태부총리
태부총리는 관직을 끝내고 방배동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필자도
근처에 살아 길에서 자주 만났다. 태부총리는 아침마다 주머니를 들고
담배꽁초를 주워 모았다. 쓰레기 청소를 몸소 시범하는 것이었다.
점심때는 조그마한 일본식 국수집에서 가끔 만났다. 태부총리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삼가 명복을 빈다.

제12대가 남덕우부총리(74.9.18~78.12.22)이다. 최장수 부총리이다.
4년3개월간 재임하였다. 남부총리에 대해서는 김정류실장과 명콤비였다는
것만 기록하고 싶다. 다만 필자에게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남아
있다.

경제장관들의 간담회가 있었다. 부총리실 바로 옆방이었다. 좀 중요한
상공부 안건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 재무부에서 반대가 나왔다.
배석했던 경제기획원 국장도 반대했다. 마지막 결단은 남부총리가 내려야
했다. 남부총리는 한참 생각하더니 "상공부 안대로 합시다. 우리나라가
언제 순탄한 길만을 걸어왔소. 힘든 고비를 하나씩 넘어서 지금까지
온것이 아니겠소. 또 힘든 고비를 슬기롭게 넘어봅시다"아주 조용한
말투였다. 오히려 혼잣말같이 들렸다. 남부총리가 스스로 자기를
타이르는 식이었다. 경제이론에 밝고 우리나라 경제실정을 잘 알고 있는
남부총리이기에 이런 힘든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경제기획원 장관에 대해서 "어떤 면을"좀 쓰게 된 이유는 단
한가지 이다. 김정렴 비서실장과의 관계를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박대통령이 "경제는 임자가 맡으시오"하고 김실장에게 경제를 맡겼다면
조직이 짜여져야 함은 당연한 일인데 경제기획원 장관과의 협조가 안되면
삐걱삐걱 소리만 나고 일이 잘 추진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김실장이 69년 10월21일 취임하여 78년 12월22일 퇴임할때까지 만
9년2개월동안 경제장관은 위에서 언급한 김학렬 태완선 남덕우 세
부총리였다. 이 세 부총리 모두 김정렴비서실장과는 이상적인 협조가
이루어졌고 이협조체제에는 빈틈이 없었다. 소위 누수현상이 전혀 없었다.
서로 믿었다. 김실장의 지시는 박대통령의 지시로 알아들었고 부총리
보고는 빼지도 덧붙이지도 않고 그대로 보고된다고 믿었다.

상공부 재무부도 마찬가지였고 건설부 농림부 교통부 과기처등도 같은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되어 시간이 흘러감에따라 이 자생적 조직은
굳어만갔다. 소위 강력한 김정렴 경제팀이 성립된 것이다.

7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입안과 시행,그리고 그결과는 김정류
작전사령부의 전략에 의해서 추진되어갔던 것이다. 큰 전쟁을 치르려면
전략이 훌륭해야 한다. 조직이 잘 짜여져야 한다. 협조가 잘되고 사기가
높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정렴 경제작전사령부는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빛나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된것이다.
박대통령치하에서 단 한번의 청와대 울타리를 넘어선 경제총수였다.

김정렴 팀을 이해 못하고 70년대의 강력하고 일사불란한 경제개발추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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