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은행 K씨(50)는 지난 88년 지점장에 오른 사람이다. 지점장이 된지 그가
처음 부도방을 찍은 기업은 자동차부품 하청생산업체.

그 회사는 모기업의 장기파업으로 한달이상 조업이 중단됐었다. 그날
돌아온 당좌수표는 1천2백50만원짜리. 결제마감시간인 오후2시30분을
넘기고 영업이 끝나는 시간인 오후5시30분이돼도 업체사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려달라"는 전화만 두번왔을 뿐이었다. 부도의
최종결정권자인 당좌담당대리는 "믿을만한 사람"이라며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7시까지는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나 그공장에 사람을 보내보고
이리저리 알아본결과 내린 판단은 "불가"였다.

그래서 부도대전을 뗐고 그 업체는 최종부도처리됐다. 오후8시가 돼서야
그업체사장은 돈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상황끝"이었다.
남은것이라곤 "인정사정없는놈"이란 욕지거리뿐이었다.

J은행 L지점장(51)은 부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4월 어느날
하루종일 가슴을 졸여야만했다. 7년동안 거래해오던 S산업이 교환돌아온
약속어음을 제때에 막지못한것. 더욱이 전년말에 1차부도를 두차례나
냈던터라 이번에도 막지못하면 이 기업은 최종 부도처리될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후7시가 되도록 "연장"을 4번씩 걸면서 기다렸다. 당좌주임은
부도처리를 할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전날 어음을 교환돌린
은행에서는 더이상 기다려줄수없다고 닦달해댔다.

그러나 L지점장은 섣불리 부도판정을 내릴수 없었다. 그 기업의 탄탄함을
우선 믿었다. "어떤일이 있어도 오후7시까지는 막을테니 기다려달라"는
사장의 호소도 무시할수없었다. 기업인에게 부도는 "사형선고"라는걸
경험에 의해 누구보다도 잘알고있는 그였다. 7시가 약간 지나서야 사장이
나타났다.

그러나 사장이 가져온 것이라곤 "돈을 준비하지 못했소. 부도를
내주시오. 앞으로 당분간 못볼테니 소주나 한잔 합시다"라는 힘없는 말이
전부였다.

부도는 한마디로 업체에는 파산선고요,업주에게는 사형선고와 같다.
"부정수표단속법"상 당좌수표가 부도나면 발행자는 10년이상을 쫓기며
살아야한다. 모든 금융기관으로부터 "불량거래자"로 낙인찍혀 재기를
꿈꾸기도 어렵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도를 최종결정하는 당좌주임과 지점장은
사형선고인으로 비춰질수 밖에 없다.

그런만큼 지점장들도 부도판정에 관한한 신중하다. 시간이 됐다고
매몰차게 부도대전을 떼는 사람은 드물다. 기다릴때까지는 기다리는게
관행이다. 때론 자기돈을 털어넣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사례비를 받거나
사금융을 알선하는 사람도 존재하는것은 물론이다.

하루에 결제가 돌아오는 당좌수표나 약속어음은 대형점포의 경우 3백건이
넘는다. 물론 대부분의 업체가 제때에 돈을 막는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든 1년에 2~3건은 시간과 씨름하다가 부도처리를 해야한다.

지난해의 경우 부도업체는 총1만7백69개였으므로 지점(총3천5백89개,출장
소는 당좌거래를 할수없음)당 3개업체씩을 부도처리한 셈이다.

"사장을 믿고 최대한 기다렸습니다. 그는 약속시간이 넘어서야 도착했고
가까스로 부도를 면할수 있었습니다. 그후 그 기업은 훌륭히 성장,지금은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회사는 제가
지점장자리를 옮길때마다 저를 따라다니며 큰 고객노릇을
하고있지요"(S은행 M지점장)
지점장들은 믿었던 업체들이 성장해 은행과 공존의 결실을 낼때가 제일
기쁘다. 그 기쁨은 다른 무엇에 비할데없는 은행원만의 "보람"이라고도
한다. 보람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업체들을 단순한 시혜대상이 아니라
공생의 대상으로 보고 진실로 신뢰하고 지원해주는 지점장들의 자기노력이
필수적임은 두말할 필요도없다.

<하영춘기자>
<이 시리즈는 매주 화요일에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