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집을 신축할 때에도 어려운 고비가 많은 법인데 하물며 한 단체가
그 회관을 지으려하니 이루 말할수 없는 숱한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중소기업회관 건물의 규모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중앙회의
임원들은 재원도 없으니 4천평 정도로 짓자고 주장했다. 나는 최소한도
1만평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들 무슨 돈으로 그렇게 큰
건물을 지을수 있겠느냐고 펄쩍 뛰었다. 그래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재원을 마련해 보겠다고 했다. 정부 예산에서 1백억원쯤 보조를 받고
1백억원가량은 우리가 마련할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나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그 좋은 자리에 조그마한 건물을 세워놓으면
집도 버리고 값도 안나간다. 30년도 못가서 사람들은 유기정 회장이 키가
작다더니 건물도 조그마하게 볼품없이 지어 놓았다고 말할 것이다. 회관은
이 나라 중소기업의 상징적인 건물이며 중소기업인의 메카라고도 할수
있다. 따라서 이왕이면 잘 짓자. 로마나 런던시청은 1천년도 더 된
건물을 쓰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몇백년은 갈 건물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말이 너무나 엄청나고 허황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만약 그렇게 시작했다가 중단하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걱정하지 마시오. 정 그렇게 된다면
내가 사겠소"라고 대답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고 기가 막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해서 설계를 하게 되었는데 대지의 위치나 크기로 보아 건평
1만2천평정도가 되어야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설계 공모를 하여 심사를
했다.
여러 응모 작품중에서 나에게는 A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은 B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고 B작품으로 결정되었으니 그렇게
발표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수 없이 B작품이 당선되었음을
공표했다.

발표는 했으나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B작품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싸대기를 얻어맞더라도 지금 얻어맞고 말자"이렇게 마음먹은
나는 이튿날 그 발표를 취소해 버렸다. 비난과 체면 손상은 각오한
바였다.

그리고 나서 A작품의 작가와 설계교섭을 했다. 설계비가
3억5천만원이라는 견적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생겼다.

건물등급에는 A.B.C급이 있고 이에따른 설계비도 A.B.C급이 있다.
은행본점 같은 건물은 A급인데 정부 청사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관은
B급으로밖에 지을수 없다. 따라서 중앙회의 경우에는 B급 설계비로서
2억5천만원밖에 계정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담당이사에게
건축비에서 1억원을 깎아 설계비로 전용하면 어떨까 하고 상의했는데
그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며 감사에 걸리니까 안된다는 얘기였다.

그러던 어느날 비서가 나에게 설계를 잘하는 분을 하나 소개하겠다고
했다.

일제때 제1고보를 나오고 동경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을 전공한 사람인데
2억5천만원에 설계를 맡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게 된것이
박춘명씨였다. 우리의 설명을 다 듣고난 그는 그 금액에 맡겠다고 쾌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건축이란 중간 과정에서 변경도 많은
법인데 그러한 추가 경비도 일절 안받겠다는 것이다.

설계가 완성되자 건축허가를 받기위해 나는 일건서류를 만들어서
김성배건설부장관을 찾아갔다. 호의적인 장관은 과장을 불러 접수해서 잘
처리해 드리라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젊은 과장은
"대통령결재를 받아오셔야 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 이유인즉
수도권정비계획의 규제에 의하여 정부청사나 정부지원기관의 건물은 서울에
지을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 과장을 찾아갔다.
"장관앞에서 그렇게 소신있게 말하다니 당신 정말 훌륭하오. 허나
여보시오,경제단체회관을 그럼 대전에 지으란 말이오"하면서 사정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후로 나는 장관을 비롯하여 기획관리실장,기타 관련 공무원을 귀찮을
정도로 찾아다녔다. 하루는 장관을 찾아갔더니 장관이 담당국장을 불러
호통을 쳤다. "그것좀 해드리라고 했는데 그것 하나 못하다니 장관 체면이
뭣이 되겠느냐"고 꾸짖다시피 말했다. 마침내 건설부차관이 주관이 되어
수도권정비 심의위원회가 열리고 그 안건을 국무회의에 상정시키게 되었다.
나는 총리를 비롯하여 부총리 각부 장관을 부지런히 찾아가 호소했다.
마침내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어 허가가 나왔다.

지금 회고해보면 하나하나의 과정이 정말 힘든 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