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정은 대화를 통한 사태수습을 주장한 전
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나 지역부대장들의 지휘권이 철저히 배제
된채 전두환.노태우.정호용등 신군부핵심세력이 유혈진압을 주도했
습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로 진압작전을 현장에서
목격한 백남이씨(62)는 당시의 상황을 한마디로 이렇게 증언했다.
52년 갑종장교로 군에 투신,연대장을 마친 백씨(당시 대령)가 장군
진급코스인 전교사 작전참모자리로 전보발령을 받은 것은 80년5월19
일자.
"18일 새벽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윤흥정사령관께 신고
를 하는 자리에서 <7공수여단이 전남대와 조선대를 접수할때까지 시위
진압을 위한 공수부대 투입사실을 몰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18일 새벽2시30분부터 20일 오전7시까지 차례로 광주에 투입된 7.11.
3공수등 3개여단 8개대대 병력은 당초 전교사 예하부대인 31사단에
배속됐다가 21일 오후4시부터 전교사로 배속이 전환됐다.
"20일 정웅 31사단장으로부터 <군에 의한 무력진압이 필요한 상황이
아님. 사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것>이라는 건의내용이 담긴 텔
렉스를 받았습니다. 서랍에 넣어둔채 사령관에게 보고하지 않았지만
2군사령부로 올라간 텔렉스가 상부에 보고돼 다음날로 정장군의 지휘
권이 박탈됐지요. 그뒤 윤사령관이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을 항의하는
시민들의 전화를 받고 무혈진압을 지시했지만 먹혀 들어가지 않았습
니다."
백씨는 당시 공수부대가 전교사상황실과는 별도로 전교사기밀실에
특전사상황실을 설치하고 진압작전에 대한 일체의 보고없이 오히려
상급부대인 전교사측에 대해 자신들에게 협조하라고 요구했다고 말
했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사실도 보고가 전혀 없어 부하들을 사복으로
갈아입혀 시내에 보낸뒤 상황보고를 받고서야 알았고,21일도청앞 집단
발포 사실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부하들의 보고에 따르면 발포당시 시
위대는 비무장 상태였습니다. 민주화운동기간중 정호용특전사령관이
광주에 상주하다시피하며 시위진압을 주도했지요.특전사 작전참모 장세
동대령은 권총을 차고 상황실로 찾아와 자신들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며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고 전교사에 파견돼있던 보안부
대 김모소령(이름을 기억하지 못함)도 협력하는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21일 오후4시 공수부대가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진압부대가 20사단으로
바뀌면서 27일 <상무충정작전>으로 완전진압될때까지 광주시내는 일시적
인 평온상태가 유지되지만 신군부의 핵심세력들은 이무렵 광주를 방문하
며 진압대책을 논의했다고 백씨는 분명히 말했다.
"이기간중 전두환보안사령관과 노태우수경사령관이 광주를 한차례씩 방
문했습니다. 전사령관이 전교사로 온다는 보고를 받았고,상황실앞을 지나
는 노사령관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통한 수습을 주장하던
전교사와 지역 부대장.참모들은 광주시민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폭도>취급
을 받아 의사결정에는 배제됐습니다.
백씨는 80년12월31일 대령으로 예편했으며 81년부터 신한기공(주) 이사로
재직하다 85년 퇴직한뒤 현재는 수입쇠고기 대리점을 경영하고 있다.
"명분없는 5.17계엄확대조치에 저항한 시민.학생들을 정권찬탈을 위해 총
칼로 마구 짓누른 신군부세력은 국민들이 책임을 묻기 이전에 스스로 역사
앞에 무릎꿇고 속죄해야 합니다." 인터뷰를 끝낸 백씨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