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의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의지는 대통령의 시정연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기국회가 개원되면 대통령의 시정방침이 발표된다. 그 전에는
중소기업에 관한 사항은 불과 두서너 줄에 지나지 않았으나 5공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는 그것이 2,3페이지에 달했다.

중앙회에서는 이즈음 중소기업의 지금사정을 완화하기 위해 공제기금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이는 중소기업협동조합법에 의거하여 정부에서
1천억원을 지원하고 민간에서 1천억원을 갹출하여 2천억원의 기금을
조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 기금의 첫째 목적은 중소기업의 연쇄도산
방지에 있었다. 즉 회원이 일정한 금액을 적립해 두었다가 타업체의
도산으로 납품대금 등을 못받게 되었을 경우에 자기가 적립한 금액의
10배까지 융자해 준다. 이것은 무이자 무담보 무보증의 원칙에 의해
운용되며 융자 받은 금액은 3년간에 걸쳐 분할 상환하면 되는 것이다.
두번째로 이 기금은 중소기업자가 받은 진성상업어음을 할인해 주며
소액일시 대출도 해준다. 또 공동구판사업자금 지원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청와대에서 3개월에 한번씩 중소기업육성 대책회의가 열렸다. 여기에는
정부의 경제부처장관과 중소기업지원기관의 장 국책,시중은행장,지방의
중소기업관련 지도자및 학계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획기적인 사항은 유망한 우량 중소기업 5천개를
발굴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대통령은"한 은행이
백1개의 중소기업을 과감히 발굴하여 지원육성한다면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중소기업 전체의 활력소가 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제도적인 뒷받침에 힘입어 나는 열심히 뛰어 다녔다. 지방에
내려가 아침에는 직할시장이나 도지사,지방기관장을 순방하면서
중소기업지원을 호소했고 점심때는 지방 기관장및 중소기업 이사장들과
함께 점심을 나누면서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다. 오후에는
중소기업자들을 모아놓고 자조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그들의 의견이나 애로
사항을 들었다. 서울에 돌아온 후에는 그것을 수렴하여 중앙요로에
건의하였다. 이런 식으로 각지방을 1년에 한번은 꼭 방문했는데 이런 것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지방기관에서 중소기업육성 자금을 자체적으로
조성하여 년리10%의 저리로 한 업소당 1천만원씩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서울에서도 업종별 조합등을 순방하고 간담회를 개최하면서 중소기업의
살길을 모색하였고 자기자랑 같아서 송구스러운 이야기지만 이런 활동이
차차 알려져 대학이나 대학원등의 세미나에 연사로 초청받기도 하였다.

중소기업지원에 있어서는 뭐니뭐니 해도 자금이 가장 문제였다. 당시
한국은행에서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자금이 전체의 50%가 된다고 늘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은총재소관인 제1금융권에 한한 것이고
제2금융권및 개발금융권까지를 모두 합해서 따진다면 중소기업지원자금은
전체의 20%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우리몫,즉 생산
부가가치 수출등에 있어서 중소기업의 비중이 40%정도 되니 자금도 전체의
40%정도를 내놓으라고 회의때마다 외쳤으며 관련기관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이런 사실이 대통령에게 알려졌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갑자기
김통위위원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하루는 한국은행의 담당부장이 나를 찾아와서 "현관 밖에 위원승용차도
갖다 놓았으니 사용하십시오"라며 한은법 책자 한권을 놓고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책자를 뒤적여 보았는데 한참 들여다본 나는 "아하,나는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은법 조합에 의하면 여수신업무기간의
임원은 금통위위원이 될수 없게 되어있었다. 중앙회발족 당시에는
중앙회가 농협이나 축협 수협처럼 여수신업무를 할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은행이 설립되면서 여수신업무는 그쪽으로 넘어갔고 따라서
중앙회에서는 그조항이 삭제되었다. 그렇지만 한은법에서는 그것을
개정하지 않는 터여서 중앙회회장은 김통위위원으로 될수 없는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지방세미나에 며칠 다녀왔더니 그사이 재무부장관으로부터
여러차례 전화가 왔었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차관보가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직감으로 이일 때문에 왔구나 하면서 "사표를 써 드릴 터이나 가지고
가시오"했다. 그러나 그는 "제가 어떻게 사표를 받습니까. 장관께서 만나
뵙고자 하십니다"하는 것이었다. 며칠후 장관을 만나 사표를 냈다. 나의
10일간의 금통위위원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