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동경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집근처의 다이이치캉교은행
오쿠보지점에 예금계좌를 트러갔다가 헛걸음친 적이 있다.
외국인등록증이나 여권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외국인을 차별하는게 아닌가 싶어 담당자에게 계좌개설시 신분증제출을
의무화한 법조문이 있느냐고 따져보았다. 그랬더니 그 여직원은 벽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가리키며 이렇게 설명했다.

"법으로 규정된 것은 없지만 행정지도에 의해 내외국인 모두 그렇게
하도록 돼 있습니다"
"행정지도에 의한 금융실명제". 오늘날 일본 금융거래의 특징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할수 있다. 금융거래의 실명화는 어디까지나 법적 강제사항이
아니라 권유사항이다.

일본이 이처럼 우회적인 금융실명제를 채택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이른바 "그린카드제"도입에 실패한 탓이다. 그린카드제란
"소액저축등 이용자카드제"의 별칭이다.

이 그린카드제는 물론 이자및 배당소득의 종합과세를 위한 포석이다.
일본정부의 세제조사회는 지난 79년12월20일 "세제개혁에 관한 답신"을
통해 이런 구상을 내놓았다.

일본은 당시 늘어나는 재정적자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세수를 늘려야하는 상황이었다.

제2차대전후 일본은 일관해서 저축증대정책을 써왔다. 경제재건을
위해서다. 금융거래의 비실명제,이자소득에 대한 원천분리과세를 실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63년부터는 저축촉진을 위해 소액저축비과세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70년대후반들어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경제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세제에 대한 비판이 터져나왔다.
소액저축비과세제도를 편법이용하는 사례가 많고 원천분리과세가 부유층에
유리하다는 점이 문제가 된 것.

일본정부와 자민당은 세수확보와 조세부담의 형평을 내세워 84년부터
이자배당소득을 종합과세키로 했다. 이를위해 이자비과세소득자를
분류할수 있는 그린카드제를 도입키로 했다. 80년3월에 개정된 소득세법의
골자이다.

그린카드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액저축(마루우)소액공채(특별마루우)우편저금의 비과세제도를
이용하려면 국가에 그린카드교부신청을 해야 한다.

둘째 국세청장은 카드신청시 성명 주소 교부번호를 기재,카드를 교부한다.

셋째 금융기관은 비과세저축에 대해 그린카드로 본인및 비과세한도액을
확인해야 한다.

넷째 과세저축의 이자및 배당에 대해서도 그린카드 또는 주민등록증에
의해 본인확인을 하여야 한다.

다섯째 카드는 제3자가 이용할 수 없다.

여섯째 이제도는 84년부터 시행한다.

하지만 이 그린카드제도는 각계의 이해대립과 수용태세로 실시연기끝에
85년에는 폐기해 버리고 말았다.

일본국세청 세무조사관을 역임하고 세무사로 일하고 있는 후세쓰네조씨는
그린카드제실패이유를 이렇게 들려준다. "우선 그린카드제가 금융차원이
아닌 조세정책적 차원에서 강구된 것이 무리였다"
금융세제변화는 금리처럼 민감한 것인데 정책입안자들은 금융거래의
심리적 요인을 감안치 않았다는 지적이다.

그는 그린카드제실시 방침에 자극받아 2조엔 이상의 예금이 금
할인채권등으로 몰리는 자금의 대이동이 일어났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 "1억중산층"이라는 일본에서 일부 계층의 탈세를 막기위해 전국민을
상대로 그린카드를 발급한다는데 대해 거부감이 컸던 점도 꼽고 있다. 즉
실명거래를 해온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도 납세번호제 도입을 위한
예비단계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갖게했다는 것.

사쿠라은행의 우타히로씨는 "설령 그린카드제를 실시했다하더라도
탈세방지효과를 거두었을지는 의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보통예금등은 실명확인대상이 아닐뿐 아니라 할인금융채등 가명투자대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명예금을 피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다른
투자대상을 활용할수 있는 허점이 있다는 얘기이다. 한마디로
국세당국이나 금융기관들의 그린카드제 도입을 위한 노력이나 비용에 비해
실속은 적다는 주장이다.

이런 분위기로 사회당등 대부분의 야당은 물론 자민당마저도
그린카드제백지화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의 그린카드제가 실패했다해서 금융실명제 자체를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는 실명에 의한 금융거래를 꾸준히 유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가명예금에 대해 높은 차등세율을 매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상품에 대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자소득에 대해 20%의 원천분리과세로
끝난다.

일본은 현재 행정지도라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금융실명거래를 유도하고
있다. 가명거래규제와 비과세저축자에 대한 본인확인이 실명거래의
주내용이다. 주민등록증등 신분증으로 실명을 확인하고 있다. 최근에는
폭력단대책의 일환으로 금융거래의 실명화유도를 위한 행정지도를 강화하는
추세이다.

다만 법적으로 금융기관은 실명확인 의무가 없고 가명거래에 대한 규제가
없어 탈세소지는 많다.

<동경=김형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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