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남대문로2가 10의1,새까만 17층짜리 건물의 6층에 자리잡은
20평남짓한 방. 이방이 바로 한달넘게 비어있는 서울신탁은행장실이다.
방이 비어있다는 것은 이방에 입성하기위한 물밑경쟁이 한달이상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다는걸 뜻한다.

방 열쇠를 차지하기위한 경쟁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91년5월28일,연임까지 했던 이광수당시행장이 수출입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밤새도록 손홍균전무와 김준협전무(복수전무)사이에 불꽃튀는
접전이 벌어진건 당연했다. 세론은 "내부행장선임"의 분위기를 타고
선임자인 손전무의 판정승으로 가는듯했다. 그러나 29일 열린
확대이사회는 김전무의 압승으로 끝났다. 당대의 실력자였던 K씨 L씨
P씨의 세력다툼 결과가 두사람의 희비를 갈랐다는게 지금까지 알려진
정설이다.

"올해 주총의 최대하이라이트". 지난92년 주총에서 은행장으로 선임된
추화규당시상업은행장을 두고 신문들은 이렇게 적고있다. 주총전날까지만
해도 이현기당시행장의 3연임이 확정적이었다. 금융계소식통들은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는 주총10시간전 사표를 썼다. 대신 "짐을
싸놓았던" 김전무가 졸지에 "왕별"을 달았다. 당대실력가들이
막판힘겨루기를 한 결과였다. 이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막강한 "줄"을 동원해야하고 그렇게 하다보면 비용도 엄청나게 드는
은행장자리.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은행장자리는 정말이지
라이벌을 이겨야된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자기세도 불려놓아야한다.
경우에 따라선 상대를 깎아내려야 할때도 있다. 최근 감사원등에
산더미같이 쌓이는 각종 투서의 70%는 은행내부로부터 온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은행장이 날아갈때마다 그 옆방(전무)에선 소리없는
웃음이 새어나온다"는 말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천하에 무서울게
없는" 은행장들이 언제까지나 "은행장메이커"에게 꼼짝못하는건 아니다.
실력자들이 바뀌면 새로운 "파워"를 찾아나서면서 언제봤느냐는 식으로도
바뀐다.

지난86년 설립된 백진무역은 5년동안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30억원의 부도를 내고 맥없이 쓰러졌다. 백진무역의 대표
현태윤씨는 실세중의 실세 P의원의 처남이었다. P의원이 한창 힘을 쓸때는
이회사도 은행들의 "자발적인"도움으로 욱일승천했으나 P의원이
3당합당으로 "실세"로 전락하자 은행들마저 외면해버린 것이다.

정확한 심사기준없는 특혜대출은 은행부실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대형업체가 휘청거릴때마다 배후인물을 들먹거리는것도 이때문이다.

은행장도 운칠기삼이기는 마찬가지다. 운이 따라주어야한다.
이광수산업은행이사장은 직업이 "은행장"이라 불릴 정도로 "장수" 했다.
83년 신용보증기금이사장을 시작으로 기업은행장 신탁은행장
수출입은행장등 10년가까이 은행장을 지냈으니 그런 닉네임이 붙을만도
하다.

반면 "별중의 별"자리를 1년도 못채우고 물러난 사람도 많다.
서봉균외환은행초대행장은 단9일(66.12.17~26)의 "권좌 기쁨"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지난90년 한일은행장에 올랐던 이병선씨는 3개월만에 "5.8대책"유탄을
맞았다. 다시 운(보람은행장)이 찾아오긴했으나 이내 사정태풍에
휩쓸려갔다.

23일 구속된 안영모동화은행장도 은행장으로선 "풍운의 사나이"라고
할만하다. "이변"을 낳으며 은행장에 올랐던 김추규전상업은행장도
8개월만에 명동지점사건으로 물러나야 했다.

어쨌든 권한이 막강한 자리인 만큼 은행장이 책임질일도 많다.
6대시중은행장을 지낸 1백여명중 20여명이상이 "사건"으로 중도퇴진 했다.
79년 율산사건으로 홍윤섭서울신탁은행장이 구속된것을 비롯 3개은행장이
그만뒀다. 80년 사정때는 4명이 한꺼번에 옷을 벗어야 했다.
장영자사건때는 임재수조흥은행장과 공덕종상업은행장이 구속됐다. 83년
명성사건과 영동개발사건에는 주인기상업은행장과 이헌승조흥은행장이
책임을 졌다. 지난해엔 이상철국민은행장이 정보사땅사건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15만은행원의 최정상인 은행장. 그들의 부침 역사는 역설적으로 올곧은
사람만이 그자리에 올라야한다는걸 보여준다.

더구나 지금은 자율과 정직을 부르짖는 "개혁시대". 현재 비어있는
4개은행장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에겐 이런 요구가 어떻게 들릴까.

<하영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