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무라의 서한을 받아 읽은 오쿠보는 대뜸 그 뜻을 알아차리고
혼자서 히죽이 웃었다. 거사를 위해서 탈번을 하여 에도로 오라는 말을
놀러오라고 은유적으로 쓴 대목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좋아,놀러 가기로 하지"
오쿠보는 중얼거렸다.

그러잖아도 그는 거사를 더 미룰수 없지 않을까 하고,혼자서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이고다카모리가 시마나가시가 되어 떠나간지도 어느덧
일년이 가까워 오고 있었고,그동안에 막부의 탄압은 조금도 누그러지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더 심해가는 것만 같더니,얼마전에는
요시타쇼인(길전송음)까지 처형을 했던 것이다.

요시타쇼인이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쿠보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면서, "보자보자하니 못하는 짓이
없군. 요시타쇼인까지 죽이다니,이이나오스케란 놈 이제 완전히 미쳤어.
미친 개라구. 미친 개는 아무나 물잖아. 안되겠어. 미친 개를
때려잡아야지,그대로 뒀다가는 또 누굴 물지 알 수가 없다구" 하고 흥분을
했었다.

요시타쇼인은 당대의 이름난 사상가이며 교육자였다.
조슈번(장주번)출신으로,열한 살 때 이미 다이묘의 면전에서
무교전서(무교전서)라는 병학(병학)을 강의한 신동(신동)이었고,열아홉 살
때는 번의 교육기관인 명륜관(명윤관)에 출강하였다.

그 역시 황국사상(황국사상)의 원류인 미도학의 영향을 받아 황실을
중심으로 한 일본역사의 연구에 몰두했고,한편으로는 당시
난학(난학)이라고 일컬었던 서양의 학술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조예가
깊었다.

그가 사형을 당한 것은 서른 살 때였는데,죽기 삼사년 전에
송하촌숙(송하촌숙)이라는 사설 학당을 열어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제자들 가운데서 후일 크게 이름을 떨친 여러 인물이 배출 되었다.

조선 침략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존황양이의 지사로서 크게 활약을 한
다카수기신사쿠(고삼진작),구사카겐수이(구판현서),그리고 명치유신에 크게
공을 세우고 그뒤 정계의 거물이 된 시나가와야지로(품천미이랑),명치
정부의 재상(재상)에까지 이른 군인 정치가
야마가다아리도모(산현유붕)등이 모두 그 송하촌숙 출신이었다.

그래서 요시타쇼인과 그의 사설 학당인 송하촌숙은 일본의 역사에 굵은
획으로 기록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