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은 1596년 경에 쓰여진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는 영국에서
반유태인감정이 극에 달했을때였다. 13세기말 공식추방됐던 유태인들이
차츰 유입되는가 했더니 왕실의 의사였던 유태인 로드리게즈 로페즈가
1593년 여왕독살미수사건까지 벌였던것. 셰익스피어는 유태인들을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로 인식하던 그리스도교세상에서 살았다. 그는
당시 유태인에 대한 미족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해 샤일록을 그렸다.

초연이후 약 1백50여년간은 "베니스의 상인"과 샤일록은 즐거운 희극과
우스꽝스런 주인공 이상의 별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1741년 찰스
메클린이 사악하고 노회하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유태인영감으로
샤일록을 그려내 대성공을 거두면서 "베니스의 상인"은 영국및
서구문화권에 반유태주의보급에 앞장서게됐다. 메클린은 이후 40년간
샤일록역을 맡았다. 1814년 에드먼드 킨이 그려낸 샤일록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반유태주의를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확산시킨
셈이됐다. 이후 영국에서는 소설뿐 아니라 탐정물,심지어 엘리어트의
시에까지 반유태주의가 일반화됐다. 심지어 20세기에 들어와 독일
나치당은 유태인탄압의 문화적 전략으로 "베니스의 상인"을 즐겨
상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태인들에게 총격이 가해지고 가스실에서 유태인들이 몰살된
대참사(Holocaust)후에는 그 어느 누구도 "베니스의 상인"을 원전 그대로
상연할 수 없게 됐다. 셰익스피어 당시 종교적 신념의 차이로 퍼진
반유태주의가 인종적 차별로 세계화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후 연극사에서 샤일록은 새롭고도 다양한 모습을 갖게된다. 70년
로렌스 올리비에가 영국 국립극장에서 샤일록을 연기할때 샤일록은
유태인이 아닌 "이방인이 되고 싶어하는 벼락부자"로 그려졌다. 60~70년대
조지 태버리는 이중구조로된 현대적 "베니스의 상인"을 미국과
독일등지에서 무대에 올렸다. 강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간수들을 즐겁게
해주기위해 "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하는 구조로 짜여 있었다.
셰익스피어이후 나치까지 이 연극에 가해진 문화사적 변천을 그린
작품이었다. 72년 구서독에서도 연출가 페터 차데크가 샤일록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고치려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인 존 로스는 최근들어 다시 유태인에 대한 편견이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샤일록의
비타협적태도를 이스라엘의 비타협적 태도에 비유하고 있는 희곡 "샤일록의
복수"(데이비드 헨리 윌슨작)등이 그 예이다.

<권영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