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되면 빨리 시골로 돌아가겠다고 들떠 있는 친구들을
다독거려서 축구연습을 하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번
리그전에 나가면 하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주제에 연습한들 뭘하느냐는
것이 축구부원들의 숨김없는 생각이었다.

고상축구부라고 하면 그당시 학교에서 한국사람들끼리만 모일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다. 전교학생 3백명중 20%인 60명이 한국사람들이었다.
"신입한국학생환영회"도 "신입축구회원환영회"로,"졸업한국학생송별회"도
"졸업축구부원송별회"로 되어 있었다.

자연히 한국사람이면 축구를 하든 안하든 무조건 축구부원이었고 학교에서
지급되는 축구부 예산도 명목뿐으로 소액이었기 때문에 각자 조금씩
갹출해서 부비로 충당하곤 하였다. 방학가까이 되면서 부비에 여유가
있을리 없고 신학기에 부비를 모아야 축구부로서는 돈구경을 할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가을 리그에 대비해서 방학전에 연습비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축구부 캡틴의 고민이었다.

부원 회의에서 연습비 십원을 캡틴이 마련하되 2학기 부비에서 반환하고
최소한 5회의 연습을 하자고 결정했다. 나는 십원의 연습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나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나에게 가능했던 유일한
방편을 택했다. 그것은 선고께서 내려주신 금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리는 길이었다.

이 금시계는 선고가 영덕국민학교에 재직하신지 10주년이 되던날 받으신
시계였다. 나도 보통학교 4학년 생도로서 이 금시계 수여식에 참석한
기억이 있고,이유는 모르겠으나 눈물을 많이 흘렸던 것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고보재학중 시계는 아예 엄두도 낼수없을 정도였고 그뒤에도 집안형편은
조금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고상2학년이 되던 봄,방학을 끝내고 상경할때
선고께서 "이 시계는 네가 가져"하시면서 그 시계를 내주셨다. 나는 사실
시계가 탐나지도 않았고 더구나 그 금시계는 나에게 과분해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보관하겠다는 생각으로 받아넣었다.

시계를 맡은지 4개월이 될까말까 한 시점에 이금시계를 저당잡히고 돈을
쓴다는 것이 선고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으로 여러번 망설였으나 축구부
친구들과의 약속,연습을 못했을 때의 내 책임을 생각하면서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신학기에는 시계를 도로 찾을수 있을 것이 아닌가.

여름방학에 그 금시계없이 집으로 내려간 나는 예상대로 크게 야단을 맞고
서울로 쫓겨 올라왔다. "그 금시계를 찾아서 내앞에 갖다놓기 전에는
일체의 학비 지급이 중단된다"는 말씀이셨다.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서울에 사는 친구들을 불러모아 전후를 설명하고
가정교사 자리를 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여럿이 백방으로 탐문한 결과
국민학교 4학년짜리의 가정교사인데 숙식을 제공하고 월 십원을 주겠다는
좋은 자리가 나서 우선 밥은 먹게 되었다.

공부하는데는 우선 암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4학년짜리 꼬마에게
일본어교과서를 암기토록 하고 구구법을 따로 외우게 했다. 그결과 방학이
끝난 2학기부터는 이 꼬마의 성적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부모가 대단히 만족해서 나에 대한 대접도 점점 좋아졌다.

신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가정교사로 번 돈을 토대로 금시계를 찾아
등기소포로 집에 보내면서 가정교사를 계속할 그다음해 봄까지는 혼자 벌어
살수 있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불상사는 끝을 맺었다.

피땀흘려 한푼두푼 모은 돈과 불로소득으로 생긴 돈은 돈의 액수도 같고
객관적인 가치도 같을수 있으나 주관적으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조르고 또 졸라서 생긴 고무신 한 켤레는 내가 어렸을때 우리
시골에서는 귀한 재산이어서 아끼고 아껴서 1년은 신었을 것이다.

그 한 켤레의 고무신을 사주시기 위해 한푼두푼을 저축한 어머니의 고충을
알면서도 그것이 갖고싶어 호소하고 호소한 결과 얻어진 귀한 물건이
고무신이었던 것이다.

이 고무신에 대한 시골 아이의 주관적인 가치는 여느 도시 아이의 좋은
가죽구두에 대한 주관적 가치보다 훨씬 클것이다.

한평생을 계속근무한 기념으로 얻은 금시계에 대한 선고의 애착심이나
가치는 아무 고통도 없이 "네가 가져라" 하시면서 내려주신 금시계에 대한
내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은 판이하게 다를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식으로서
선고가 느꼈을 정도의 애착심은 나도 가졌어야 옳았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것은 내 자신이 큰 고생없이 편하게 살아 왔었기
때문이리라.

이런저런 주변의 여러 형편을 모두 꿰뚫어보고 더 신중했어야 마땅 했다.
선고를 상심케 한데 대해 죄스럽게 생각한다.

하나의 결정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여러가지 반사작용을 미리 헤아려 보는
조그만 지혜도 이러한 경험에서 생겨났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