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킨 우리나라의 금융가명제는
지난 10여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계속 유지될수 있었다.

그간 정부는 한번도 내놓고 실명제 실시를 반대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부작용을 극소화하는 "완벽한"사전조치를 준비하기 위해,혹은 검은 자금의
금융시장이탈과 해외도피가 경제에 주는 충격을 피하기 위해,혹은 경제가
어려운 고비를 넘은 후에 실시하기 위해 등등 다양한 이유를 내세워
신중하게 단계적으로,철저한 연구와 준비를 거쳐 시행하겠노라고 말하면서
우리 정부는 여론의 압력을 계속 회피해 올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명제
실시와 관련시켜 뚜렷한 근거도 없이 상상해볼 수 있는 온갖 부작용을
꾸준히 반복 경고함으로써 우리 국민들은 세상 모든 나라가 실명제를
실시해서 깨끗하게 살더라도 우리나라만은 실명제를 실시하게 되면
성장이고 안정이고 모두 끝장날 것 같은 공포감마저 갖게 된것 같으니
대중매체를 통한 여론조작의 위력을 다시 한번 통감하게 된다.

평생을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해온 98%가 넘는 국민은 도대체 가명제가 왜
필요한것이고 또 가명제가 없으면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살기가
힘들어지는지 궁금할 것이다.

첫째로 특정 개인이나 기업가에게 엄청난 물질적 특혜가 돌아갈 수 있도록
정책결정을 해줄수 있는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사람이 그 수혜자로부터
반대급부를 챙길때 금융실명제가 있으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닐 것이다.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은 문제가 덮어질수 있겠지만 실명제란 여기저기
범죄현장에 지문을 남기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후에 권력을
상실하게 되면 문제가 될 위험부담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권력을
이용해 축재를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실명제 실시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로 특출한 기업가 능력도 없이 정권의 핵심에 뇌물성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특혜를 받아 기업을 확장해 온 기업가는 실명제가
실시되면 계속 기업가 행세를 하기가 무척 힘들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약
기업가로서의 능력보다 정경유착에 의존해온 기업가가 있다면 이들도
실명제 실시와 함께 시장경제에서 탈락될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큰 돈을 장만해 일선에서 은퇴한 후
지하금융시장에서 큰손 노릇을 해온 사람이 혹시 있다면 그런 사람도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될 것이다.

금융의 가명거래를 습관적으로 해오던 2%미만의 사람들 가운데도 그
대부분은 별 생각없이 그저 편리하다는 이유 하나로 가명.차명거래를 한
것이지 제도가 바뀌었다고 해서 구태여 짐을 싸가지고 이민을 갈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명제가 실시되면 이제 좋은 세상
다 지나갔구나 하는 정도의 가벼운 체념을 하고 새제도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실명제를 실시한다고 해서 새삼 외환관리법을
위반해가며 해외 도피를 해봐야 갈 곳은 실명제가 이미 완비되고
자본수익률도 낮은 선진국밖에 없을 것이다.

실명제 때문에 우리나라를 등지고 나가려는 검은 자금의 규모가 클 수도
없지만 설혹 크다 하더라도 자본자유화때문에 한국의 장래를 믿고
들어오겠다는 각종 외국자금의 규모가 금년만해도 70억달러가 넘을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외자유입에 따른 인플레압력을 걱정하는 통화관리당국의 근심을
덜어주는데 일조할 것이다.

실명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구실의 하나는 선진국중에
유일하게도 일본이 아직 실명제를 실시하지않고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가장 실패한 부분이 바로 정치부패 토지정책 농업정책인데 한국이 묘하게도
일본의 제일 못된것만을 골라서 흉내를 낸다고 해서 일본을 따라잡을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명으로 얼마든지 금융자산을 보유할 수 있고 명의신탁을 이용해서 남의
이름으로 토지를 보유할 수 있는 체제하에서의 공직자 재산공개라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의미밖에 없을 것이다.

부정부패와 금융가명제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좀도둑을
잡는 차원을 넘어 구조적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것은 실명제 실시없이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개혁이라는 것은 기상천외의 조치를 해서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명제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꼭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소수이면서도 막강하기 짝이 없는 그 기득권층의
저항을 극복하고 즉시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