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매달 과학기술공로연금을 받는 단 한사람의 과학자
윤한식박사(64).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하다보면 어렵게만 여겨지던 과학이
그저 쉽게만 생각된다. 불쑥 과학도가 되고싶은 마음도 내킨다. 가장
높은 경지는 진리를 가장 쉽게 설명하는 것임을 공자에서 보듯 윤박사의
과학기술 이야기에서도 다시한번 확인한다.

서울공대섬유공학과를 나와 정년을 1년앞둔 지금까지 평생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보낸 윤박사는 지난86년 기적의
섬유신소재로 불리는 아라미드펄프를 개발해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52세에 석사,55세에 박사를 딴 늦깎이의 학력이 상징하듯 다소
기인적풍모를 지닌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노벨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누구나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한마디쯤 입에 올려야 지식인 행세를 하게끔
된 시대에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떠벌리기를 좋아해 과학자로서는
실격"이라는 윤박사의 과학기술현실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는 탄식과 희망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평생학문"각오해야

-책상위에 외국에서 온 편지들이 많은 것 같은데 공개할수 없는
내용들입니까.

<>윤박사=하나만 공개하지요. 미국 사이나미드사의 기술구매담당중역이
보내온 것입니다. 92년초에 발간된 아라미드펄프 이야기를 읽고 제가
구미선진국에 내놓은 특허를 사고싶다는 내용입니다.

-파실 생각입니까.

<>윤박사=주위에서는 눈 딱감고 팔아버리라고들 합니다. 국내업체들은
너무 둔감해 잘 거들떠보지도 않는 판에 붙들고 있으면 뭘 하겠느냐고
말입니다. 우리업체들이 나중에 값을 몇배 더 쳐주고 되사오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팔고보라는 것입니다. 국내의 과학기술풍토를 바꾸려면
자극이 필요하다는 얘기지요.

-우리의 과학기술풍토가 그처럼 엉망이라는 말씀입니까.

<>윤박사=과학기술을 하는 사람은 많은데 거의 말로만 할뿐 연구실적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과학기술은 입이 아니라 오랜 경험의
축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과학기술계에서는 무엇을
해놓았느냐는 따지지않고 그저 어디어디를 나와 무슨 학위를
받았다는것만으로 인정받고 또 인정해주는 풍토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정책당국자들도 같이 춤추고 대부분의 인센티브가 입으로만
과학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다보니 과학기술자는 많은데 과학기술은 적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가지 걱정스런 현상은 젊은
과학도들이 연구를 안한다는 것입니다. 몸은 연구소안에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있습니다. 새정부도 그렇지만 교수들이 대거 정부요직에
발탁되다보니 너도나도 정치판이나 기웃거리고 지방대학강사라도 하겠다고
줄을 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선생님은 과학자로서 행복하게도 자신의 목표를 성취했다고 할수있는
몇안되는 사람중 하나입니다. 그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모두 선생님같은
성취감을 맛볼수는 없는일 아니겠습니까.

<>윤박사=과학은 머리좋은 사람만이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거의 누구나
평생을 투자해 끈질기게 매달리면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놓게 되어있습니다.
과학적 성취는 머리나 운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젊은이들이 끈기있게
연구에 몰두하지 못하는것은 주변여건이 나쁜 탓도 있지만 본인들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학기술수준과 관련해 일반국민들사이에서는 꽤나 혼란이 있을
법도 합니다.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즐비하다고 하면서도 막상 현장기술은
낙후됐다고 야단들이니 말입니다.

<>윤박사=조용히 연구만 하는 사람들의 실력은 세계수준에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 과학자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뿐이지요.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특수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한나라의
과학기술수준은 일반국민의 과학상식수준으로 측정하는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와 관련해 선진국에서는 청중이해도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주 전문적인 과학기술내용을 아주
쉬운 방법으로 설명해 몇%가 그것을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해도가
높을수록 선진국이고 낮으면 노벨상수상자가 있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수준으로 볼때 한국은 국민학생수준입니다. 내 사무실에 들르는
방송기자들도 인터뷰할 때는 항상 "국민학생이 이해할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달라"고 합니다. 이에비해 일본은 고등학생,미국은
대학저학년수준입니다. 일본 NHKTV를 보면 전문가가 길가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화제가 되고있는 과학기술토픽에 대해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때면 여학생이나 노인들도 흥미롭게 경청합니다.

또 그 나라의 대중잡지에 실리는 과학기술기사를 보면 그 나라의
과학기술수준이 측정됩니다. 대중잡지인 TIME을 보십시오.
과학기술기사가 얼마나 수준이 높습니까.

-다시한번 "국민학생이 이해할수 있는 수준으로"선생님의 업적인
아라미드펄프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윤박사=언론은 언제나 어디에 사용할수 있는가에만 초점을 맞춥니다만
내 연구는 실용적 의미보다 과학적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섬유를 만드는 방법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이지요. 이것은 인체의
피부 머리털등 섬유질이 생성되는 과정을 실험실에서 재현해 놓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아라미드펄프는 강철보다 5~6배나 강하면서도 무게는 5배나 가볍고 가격은
기존 탄소섬유의 4분의1에 불과한 "제3세대의 합성섬유"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제학술저널인 "네이처"(NATURE)가 내 연구를 취급해준것도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네이처"에 논문이 게재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윤박사=모든 자연과학학술분야를 망라해 새로운 학문적 지평을 연
연구업적만 실어줍니다. 여기에 논문이 실리지 않는다는 것은
노벨상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뜻도 되지요. 일본의 경우 "네이처"에
투고했다 거절되는 논문만도 연간 7천~8천편이나 됩니다. 우리의 경우는
저를 빼놓고는 아직 투고조차 해본적이 없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엔지니어창업에 기대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연구결과가 상용화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윤박사=연구실에서 갓 태어난 새기술을 상용화측면에서만 보면 그
기술이 공업화될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사업가의 몫이지요.

사업가는 그 기술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묻지않고 그 기술로 당장
돈을 벌수있느냐 없느냐만 따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것은 국내
기업인들이 대부분 장사하던 분들이라서 그런것 같습니다. 외국에서는
엔지니어가 직접 창업해서 대기업으로 발전한 경우가 많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우리기업인들은 외국에서 새로운 기술로 큰 돈을 벌었다는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 기술을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과학기술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윤박사=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제도를 과감히 뜯어 고치는 일이
시급합니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국어 영어 수학은 모두
언어교육일 뿐입니다. 수학이 왜 언어냐구요. 수학은 그 자체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언어"일 뿐입니다. 과학을 수리적으로 가르치는데는
수학이 필요하지만 창조하는데는 도움이 안됩니다. 제품생산에는 창조력이
더 긴요하지요.

한창 머리의 컴퓨터가 채워져가는 청소년시절에 그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수학으로 차느냐,과학으로 차느냐에 따라 과학기술의 장래가 달린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과학을 적어도 수학과 같은 비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남다른 교육열을 과학하는데로 몰아넣을수만
있다면.하는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새정부의 과학기술정책담당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윤박사=지구위의 자원은 한정돼있기 때문에 앞으로 모든 나라가 다 잘
살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선진국들은 자기들끼리만 잘 살기위해
후진국들이 못 쫓아오도록 여러가지 범지구적인 장애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위치는 선진국대열에 턱걸이를 하느냐,다시 후진국으로 밀려나느냐
하는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선진국대열에 끼여들지 못하면
영원히 그 문턱을 넘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새정부가
과학기술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투자의 타이밍을 놓치면
그만입니다.

선진국에서 만들어내는 제품이라고해서 모두 하이테크제품은 아닙니다.
90%는 종전제품에다 예술과 디자인을 첨가해 팔아먹는 것이지요. 이 말은
곧 고등학교 과학교육만 충실히 받아도 얼마든지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수
있는 중소기업인이 될 자질을 갖추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중소기업인들이 많아야 과학기술의 뿌리가 튼튼해지는 법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말은 소문내고 떠벌리며 과학기술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기술이란 독점의 속성이 있어 옆사람 모르게
조용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을 무슨 정치선전하듯 해온 역대
정부의 경박성이 새정부에서는 사라졌으면 합니다.

<대담=김수배과학기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