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목] 집권 중반이후 더욱 악화 .. 신산업정책 논란도
기업 정치참여 빌미 .. 민주화과정 구조조정 시각도

6공1기는 재계와 정부및 정치권간의 갈등이 그어느때보다 불거진 기간
이었다.

좋게보면 타율과 관치에서 자율과 민간주도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고 할수
있다. 또 어찌보면 정경유착으로 표현돼온 구조적 부조리의 책임을 상대방
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몸싸움을 벌인 기간이었다고 해석할수도 있다.
한마디로 달콤한 밀월을 끝내고 권태기에 접어들어 끝내 파경을 맞게된 부
부사이를 연상케 했다.

정부와 정치권은 경제력집중 완화를 이유로 5.8조치와 같은 초법적인 "대
재벌정책"을 무더기로 쏟아내놓았고 재계는 끝내 정치참여라는 승부수로
맞서 우리나라 경제사에 지워지지 않을 궤적을 남겼다.

돌이켜보면 6공과 재계와의 마찰은 6공출범과 동시에 예견됐던 일이다.
5공청산 청문회에 기업인들이 줄줄이 불려나가 과거의 "역사"를 "비리"로
자인하게끔 되면서 앙금이 쌓이기 시작했다고 볼수있다. 자발적인 협조든
힘과 압력에 못이긴 굴종이었든 권력과의 결탁으로 인정할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고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비난을 당하게 되자 그동안 참아온 울분이
노출될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6공초기의 경제여건이 워낙 좋지않아 표면적인 알력은 노출되지
않았다. 3저호황을 구가하던 경제가 저성장 고물가 국제수지적자의
국면으로 곤두박질치고 6.29의 여파로 극심한 노사분규가 일어나 불편한
심사를 드러낼 처지가 못됐다.

금융실명제추진과 토지공개념 도입에 대해 불만이 고조돼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인다짐대회를 열어 이들조치에 적극협력하겠다고 한것도
이같은 분위기 탓이었다. 90년1월에는 3당통합으로 여권의 입지가 강화돼
정치권과의 관계는 오히려 개선되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정부도 이에맞춰 4.4경제활성화 조치를 통해 금융실명제를 무기한
보류하고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펴 화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달만에 터진 5.8조치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돼온 재계와
정부사이는 결정적으로 금이가고 만다. 기업의 비업무용토지를 매각하는등
대기업의 자구노력과 체질개선을 통해 경제를 살려보겠다는게 취지였다.

기업들도 통치권차원의 결단인만큼 항명할 엄두도 못냈다. 하지만 속으로
응어리진 불만은 재계와 정부간 마찰의 기폭제가 됐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단순히 불요불급한 부동산을 처분하는데 그치지 않고 착공을 미루고 있는
공장부지와 종업원주택부지까지 처분토록 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5.8조치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기업이 부동산투기의 주범으로 인식되는
분위기까지 조성됐다. 당시 기업인들은 경제실패의 책임을 모면하기위해
기업을 속죄양으로 삼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 5.8조치는 뒤에 롯데와 현대그룹이 소송을 제기,법적분쟁으로
비화됐으며 금호그룹은 소송을 내기로 했다가 취소하는 해프닝을 치르기도
했다.

5.8조치로 불붙은 갈등이 수면위로 노출되기 시작한것은 6공 1기중반을
넘긴 91년5월을 전후해서다. 경제상황이 계속 악화되면서 경제단체장들이
정책실패를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경부고속전철과
영종도신공항건설의 백지화를 요구했고 정명예회장의 대선출마설이 나돈
것도 이때부터다. 때를 같이해 정부도 대기업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해
양측간의 알력이 노정됐다.

10월에 국세청장이 현대그룹의 주식이동조사 사실을 이례적으로 국회에서
공개하면서 현대와의 대립에 불이 댕겨졌다. 한달만에 1천3백61억원의
세금이 추징되는가 하면 "정명예회장은 돈이 없어서 세금을 못내겠다"고
버티기까지 했다. 청와대에서 공사를 하고 받지못한 공사대금을
받아내기위해 소송을 내겠다는 발표까지 이어졌다.

사실상 재계와 정부와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수 없는 형국이 돼버렸다.
그동안 양측의 사이에 끼여 신중한 입장을 보이던 경제단체도 "더이상
기업을 비난하는 일을 자제해 달라"며 공식적인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이같은 소용돌이는 총선과 대선정국으로 이어지면서 극에 달한다.
정명예회장이 국민당을 창당하면서 정치자금을 폭로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하게 된다. 이어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의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다.

대기업그룹의 창업주가 정치에 뛰어드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을 뿐
아니라 재계 자체내의 사분오열로 까지 확산된 셈이다.

이를 전후해 경제력집중을 억제하기위한 조치들이 하나씩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근거도 불분명한 "신산업정책"이 나돌면서 파문을 일으켰는가
하면 재벌해체설 그룹기조실해체계획 등이 공공연히 거론됐다.

실제로 30대그룹의 상호지급보증을 동결한데 이어 공정거래법개정을 통해
지급보증축소와 대기업그룹의 내부거래에 대한 규제가 법제화되기도 했다.
정부측에서는 7차5개년계획의 일환일 뿐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했지만
재계는 대기업을 옭아 매려는 의도적인 수순이라고 불안해 했다.

6공1기내내 이어진 이같은 재계와 정부와의 마찰은 마침내 대기업그룹이
정치일선에 뛰어들어 일대격전을 벌이는 상황까지 이어진다.

사실 개발연대이후 대기업은 엘리트 관료집단과 함께 우리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부인할수 없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밀고 끌어주는 공생관계가 형성됐고 알게 모르게 부조리가 배태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양측모두에 쇄신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재계는
업종전문화와 소유분산을,정부는 지나친 개입축소를 요구받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태우대통령의 집권기간에 빚어진 재계와의 갈등은
단순히 정치지도력 약화나 누적된 불만의 표출이라기 보다 시대적요청에
따른 구조조정과정의 한 단면으로 이해할수도 있다.

기업과 정부 정치권이 넘지 말아야할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으며 흐트러진 양측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해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이 6공2기의 과제로 넘겨졌다.

[면 종] 3면 종합해설
[저 자] 정만호 기자
[사 진] 89년 7월 11일 기업인 결의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