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992년 단기 4325년이 이윽고 저문다. 저멀리 지평선너머로
가물가물 숨어버리는 석양처럼 긴 그림자를 또 한권의 역사책속에 묻으면서
저물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1년은 한마디로 국내.중간에 국외 할것 없이 격동과
파란이 만장했던 한해였다. 때로 기쁜일 감격스런 일도 없지는 않았어도
전체적으로는 좋지못한 딱하고 안타까운 일이 더 많았다.

우선 국내적으로 지난 1년은 선거로 시작해서 선거로 끝난 한해였다. 좀
심한 표현을 쓰면 정치놀음에 경제가 멍든 한해였다. 그래서 새 지도자가
탄생했고 "안정속의 변화와 개혁"을 통해서 "신한국"건설과 "신경제"창조가
기약되어있건만 국민은 별 감흥없이 조용한 세모를 보내고 있다.

예전처럼 선거철에 돈이 너무 풀려 물가가 뛰고 산업현장의 인력이
빠져나가는등의 부작용때문에 경제가 멍든건아니었다. 그걸 염려해서
네차례의 선거를 두차례로 줄이기까지 했지만 3.24총선과 12.18대선 모두
우려했던 전통적 부작용은 없었다. 경제가 멍든건 돈과 물질보다 마음과
정신이 온통 정치와 선거에 쏠려 아무도 경제를 돌볼 생각을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대권을 향한 정가의 이합집산과 불꽃튀는 경쟁이 30여년만에 처음으로
일찍부터 점화된 가운데 정부의 레임덕현상은 사실상 1년내내 이어져
경제가 곪는걸 방치했으며 기업과 근로자는 또 그들 나름대로 정부와
정치,제도와 세태만을 원망하면서 보냈다. 성장률이 상상을 넘어
곤두박질치고,극심한 불경기때문에 물가가 덜 오르고 국제수지도 생각보다
많이 개선되었건만 당국은 눈하나 꿈쩍않고 정부의 안정정책과
산업구조조정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도합 1만개가 넘는 중소기업부도와 도산사태,중소기업사장의 잇따른
자살,상은명동지점장자살과 가짜CD(양도성예금증서)파동,정보사땅
사기사건 소동과 선경의 제2이동통신반납해프닝,종내2조9,000억원의
한은특융처방아니고는 배길수 없었던 절박한 증시모습등등이 따지고 보면
모두 우연이 아닌 것들이었다. 필연적이었다고 해야 옳다.

황영조의 바르셀로나 하계올림픽 마라톤제패는 그나마 큰 위안이었다.
우리의 무력감을 말끔히 씻어주는듯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이른바 종말론교회의 휴거소동은 우리 사회의 깊은 병을 단적으로 증언해
주었다. 황선수는 최근 난데없는 은퇴선언과 번복소동으로 국민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어지러운 속에서도 외교,특히 북방외교만은 평가할만한 업적이있다.
8.24한중수교에 이어 12월22일 한.베트남수교에까지 성공함으로써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시작된 5년간의 북방정책은 최소한 기초를 일단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1992년을 보내면서 6공1기 노태우정권도 사실상
막을 내리는것과 다름없는데 북방정책은 바로 6공1기정부의 가장
기록될만한 업적이기도 하다. 물론 그 과실 취하는 일은 아직 숙제로
남아있다.

금년2월 평양에서 열린 제6차고위급회담에서 서명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긴장완화와 통일을 향한 역사적 문서로 평가되었다.
다만 그것이 진정 어떤 의미를 갖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사실을 무산된
제9차고위급회담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면서 우리는 지금 진한 허탈감에
빠져 있다.

눈을 밖으로 돌리면 탈냉전이후의 신질서모색에 부심해온 국제사회의
혼돈을 보게된다. 기대했던 경제회복은 오지 않았으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체결로세계경제의 불록화경향이 새삼
우려되는가운데 GATT의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과 유럽공동체(EC)의
통합노력등 기존의 경제질서도 순탄치 못했다. 리우환경회의는 지구와
인류의 장래를 위해 의미있는 모임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갈등과
마찰요인이 될것으로 경계되고 있다.

신국제질서는 아직 그모습이 분명치 않다. 세계도처에서는 1년내내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는 보혁대결이 계속되고 있고
경제적으로 홀로설 날이 아득한 가운데 유고내전과 체코의 분리독립,독일
신나치극우테러등 민족간 갈등이 절정을 이루고있다. 기대했던 중동평화는
이스라엘의 돌연한 팔레스타인난민추방으로 더욱 멀어지고있고
소말리아에는 마침내 미군을 주축으로한 다국적군이 유엔주관아래 파견되어
구호와 내전종식에 나서고 있다.

미소양극체제의 붕괴로 생긴 힘의 공백을 메울 그 어떤 대체세력과
리더십의 등장을 보지못한채 세계는 계속 예측이 어려운 한해를 보냈다.
그런 가운데 패전국 독일과 일본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을 넘보기 시작했고 군의 해외파병길까지 텄다. 중국은 10월의
당14전회를 계기로 "사회주의시장경제"를 공식선언하고 나섰다.

과연 우리가 살길은 무엇이고 어떻게 앞날에 대비해야할지 모두 곰곰
생각하면서 새해를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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