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윤교수(61.충북대불문과.한국산악회종신회원)에게 전화를 걸자 대뜸
"산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럼 한번
만납시다"이다.

다소 깡마른 체구,욕심을 버린듯한 선한 눈빛과 넉넉한 모습,투박한
말투는 듣던 그대로 "산사나이"이다.

김교수는 "산이 곧 시고 시가 곧 산"이라고 했다. 이는 곧 산과 문학이
어우러진 그의 60평생을 대신 하는 말이기도 했다.

경기고를 졸업한뒤 53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석사과정까지 마쳤다.
69년 프랑스 그르노블대에 유학,불시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르노블대를 택한것은 산때문이었다.

82년 9월부터는 충북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3때 산악부입문
-처음 산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언제부터였습니까.

<>김교수=중학교3학년때로 기억됩니다. 산악부 선배들의 권유로 산을
타게 됐습니다. 당시 처음 대한 인수봉에 큰 충격을 받고 산악부에
들었죠. 인수봉은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이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습니다. 어린마음에 느꼈던 산의 매력이 제인생을
바꿔놓았다고나 할까요.

-당시 함께 산악부 활동을했던 사람들중에는 어떤분들이 있습니까.

<>김교수=몇몇 사람은 이북으로 갔고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중에는 정명식
포항제철회장과 이강흡 인하대 교수등이 있죠.

정회장이 학교는 1년선배지만 산악부로는 나보다 1년늦습니다.
정명식회장이 46회,제가 47회,그리고 이교수가 48회입니다.

중학교시절에는 인왕산이 압벽등반트레이닝코스였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트레이닝을 받고 일요일에 바위를 타곤했죠.

-집에서 산을 타는것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았습니까.

<>김교수=어머님이 매우 특별한 분이셔서 말리거나 혼을 내신적이
없습니다. 매우 활달하신 분인데 한번도 산에 가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점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문학을 택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김교수=서강대 김영덕교수(물리학)가 제 형님인데 그분의 영향이 컸죠.
어학을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그리고 저도 어려서부터 문학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프랑스의 그르노블대학으로 유학을 가신 것도 산때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김교수=맞아요. 산이 좋아 그르노블대학를 택했습니다. 공부도 하고
산도 가고 싶어서 그랬죠. 그르노블은 68년도에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한국산악회 젊은이들을 프랑스 국립등산스키학교로
초청하기도 했죠. 샤모니에는 6번이나 갔습니다.

-한국산악회에는 언제부터 활동하셨습니까.

<>김교수=한국산악회가 만들어진 것은 45년입니다. 역사학자들의 모임인
진단학회에 이어 두번째로 출범한 자발적 민간조직이죠. 산악회에 참여한
것은 대학교 때 였습니다. 1957년인가 여름에 우리가 처음으로 설악산에
들어갔었죠. 당시에는 전쟁직후라 위험해 아무도 설악산에 가지
못했습니다.

-해외 산들도 많이 가보셨습니까.

<>김교수=미국의 요세미티,알프스의 샤모니,피레네산맥의 페르두산등을
꼽을수 있습니다. 우리산은 아담하고 수려합니다. 반면 외국은 스케일이
크고 바위가 톱날같습니다. 그쪽이 청년기라면 우리는 노년기라고나
할까요. 산도 제대로 알려면 매우 복잡합니다.

우리나라 인수봉은 코스가 다양하고 좋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바위타는
기술은 결코 외국에 뒤지지 않아요. 다만 빙벽타는 것이 문제죠. 파리나
런던 동경같은 경우는 이만한 산을 타려면 시내에서 몇백 나 가야되므로
외국인들도 우리를 부러워합니다.

다만 한가지 산은 좋은데 매우 지저분하다는 지적을 받곤 합니다. 창피한
얘기죠. 우리나라 국민성에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

-캠페인도 하고 그러는데 제 생각에는 산을 모르는 사람들이 산을 가니까
그런것 같기도 하고.

<>김교수=그렇죠. 산을 아낀다면 절대로 그렇게는 못할것입니다.
외국에는 전문적인 산안내원들이 많습니다. 산안내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죠. 프랑스에서는 가이드들이 60세가 되면 은퇴해 산장주인이
됩니다. 조직체계가 무척 잘돼있죠.

우리나라 산장운영은 문제가 많습니다. 정부가 지원을 해주기 보다
이권에나 개입하려고 해요. 세털보(지리산과 설악산의 산장주인을
가리킴)중에 두 털보가 다 쫓겨났잖아요.

-우리도 유럽처럼 체계적인 운영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김교수=프랑스의 경우 정식 가이드가 되려면 7년쯤 걸립니다.
트레이닝도 매우 엄격하죠. 프랑스에는 국립등산학교가 있어
전문가이드자격증을 주고 있습니다. 매우 조직화 돼있죠. 우리나라는
이런 체제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소규모 등산학교가 있어 여름철에
젊은사람들을 모집해 암벽트레이닝을 시키곤 하지만.

-등산학교 만드셨을때 얘기좀 해주시죠.

<>김교수=70년대 전반기였죠. 30명정도를 모집해 등반도 시키고 캠핑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애들 데리고 다니긴 좀 겁나요. 사고도 날수있고..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지원을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청소년
문제도 많고한데 건전한 청소년 문화를 육성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뭔가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모두들 자기것 챙기기에
바쁘니.. 스포츠가 뭔지도 모르면서 난데없이 나타나 설쳐대기나 하니 잘
될리 없죠. 프랑스같은 경우 청소년스포츠장관중에 산악인출신이 많아요.

샤모니시장과 프랑스 청소년스포츠장관을 역임했던 모리스 에르조그 같은
사람은 인류최초로 8천 급 거봉 안나푸르나(8천91 )를 등반 했던
사람입니다. 그게 아마 1950년이죠.

-프랑스는 청소년스포츠장관이라고 부릅니까.

<>김교수=우리도 여기서 흉내낸것 같은데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내야지요.
엉터리들이 모여가지고 뭘한다고. 그 사람들이 뭐 스포츠를 압니까.

회갑때 인수봉등반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암벽등반을 하신다면서요.

<>김교수=지난4월께 환갑기념으로 후배 산악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봉산 인수봉에서 집사람(탁순애여사.한양여고 화학교사)하고 같이
암벽등반을 했죠.
집사람도 산을 좋아해 이화여대 사범대학 산악부를 창설하기도 했죠.

-암벽등반을 하면서 조난이나 부상을 당한적은 없는지요.

<>김교수=산은 언제나 위험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초보단계의 조난은
별문제이지만 어느정도 기술을 닦은후에 일어나는 조난은 치명적입니다.

내가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던 것은 운이 좋았지만 겁이 많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산악인들이 외국에 가 많이 죽는데 어려우면 물러설줄도
알아야지요.

-산에 대한 철학이 있으실 텐데요.

<>김교수=단지 산을 타는 기술만을 생각한다면 다람쥐보다 뛰어난 산꾼은
없을 것입니다. 기술도 중요하지만 먼저 인간이 돼야 합니다.

작은산이건 큰산이건 산을 좋아하고 산을 즐기고 산을 사랑할줄 알아야
합니다. 산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습니다. 산이 곧 시고 시가 곧
산이라고나 할까요. 무엇보다도 산악인은 순수해야합니다. 욕심을
버려야되죠.

민주산악회라는 단체있잖습니까. 그사람들 좀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산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합니까. 산은 순수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로 산을 사랑한다면 산을 위해 뭔가 일을 해야죠. 하는
일은 하나도 없으면서 이름만 산악회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산악인은 순수해야
-교수님 자신은 산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김교수=에르조그는 산은 도전과 속세로부터의 피신이라는 양면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나도 그렇죠. 산에 가면 즐겁고 편합니다.

세상은 왜그리 복잡한지. 교수들도 왜 그렇게 싸우고 돈을 좋아하는지.
산은 순수해 좋습니다. 산에 가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납니다.
산사람들은 거짓이 없죠.

워즈워드가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고 그러는데 저는 산을 대하면
가슴이 뜁니다.

산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회적 욕망이나 명예욕 경제적 풍요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후회해본적은 없습니다.

-40여년 산악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김교수=지난 69년 당시 히말라야 원정훈련대 10명이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때아닌 눈사태로 모두 몰살당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준비위원장이었는데 모든 책임이 나한테 있는것 같아 지금도 가슴이
저립니다.

-산이나 시나 모두 어려우셨을 텐데 어느정도나 정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교수=전혀 정복하지 못하고 망쳐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백을 기준으로 평가 하신다면 어느정도나..

<>김교수=마이너스 백점입니다.

대 담=김영용<편집부국장> 외신부장